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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찰

By 2010/12/23 10월 25th, 2016 No Comments


“감시는 단지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이다.”
– David Lyon, "Introduction", Surveillance as Social Sorting, Routledge, 2003, p1.

 

11월 마지막주 금요일. 강의를 나가는 학교에서 한 학생이 말했다. “연평도 사건에 대해 인터넷에 글을 쓰기가 무섭습니다.” 그는 무슨 대단한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공포가 있다. 우리의 공포에는 이유가 있다.

정치권 사찰에서 민간인 사찰로

올해를 뒤흔들었던 사찰 파문. 처음에는 황당한 일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공무원들의 윤리 감찰을 담당하는 국무총리실의 한 부서가 대통령을 비판한 동영상을 자기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조사하고 그에 대한 경찰 수사에 관여하였으며 당사자가 근무하는 회사에 압력을 가하였다는 소식이었다. 다른 곳에서 퍼왔을 뿐인 블로그 포스트 하나가 이렇게 무시무시한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인가?

한 정부 조직의 돌발적이고 무리한 월권 행태로 보였던 이 일화는 소위 ‘영포 라인’과 여당 중진 정치인에 대한 사찰 논란으로 이어지며 지배권력 내부의 권력투쟁 양상으로 변화하였다. 민간인 조사의 계기 역시 이명박 정부의 정적(政敵)이라 할 친노그룹의 경제적 후원자라는 혐의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제 정치권 공방이 되어버린 사찰 논란을, 국민은 관전자가 되어 지켜보았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으나 아무도 그 칼끝이 ‘몸통’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사찰은 분명 위법적이며 월권적인 행태였지만, 권력다툼의 문제가 제대로 수사될 리가 없었다. 말단 3명이 기소되었으며 결국 유죄 판결이 났지만 의혹은 커져만 왔다. 정치권에서 충격적인 폭로가 계속 터져 나왔다. 주요 증거라 할 컴퓨터의 하드디스크가 ‘이레이저’와 ‘디가우저’라는 신기의 기술로 망가졌다고 하며, 청와대가 총리실 불법사찰을 타인 명의의 ‘대포폰’으로 지휘했다고 하고, ‘BH 하명’ 등이 적힌 총리실 전사무관의 수첩이 공개되었는가 하면, 그 수첩에서 거론된 사찰 대상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롯하여 정치인과 민간인 다수를 아우른다고 한다. 계속되는 폭로에 대하여 검찰이 모두 “문제 없다”고 방어하며 재수사 요구를 빠져나가는 것도 주요 관전 포인트였다.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정치권과 주요 언론 지면에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는 하였으나 이 사건은 여전히 ‘국민 모두의’ 관심사임에 분명하다.

검찰이 재수사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미 이명박 정부는 교체 이후에도 시민들의 뇌리 속에 ‘사찰 정부’로 기억되기에 충분할 듯하다. 김영삼 정부가 미림팀의 ‘도청’과 함께 기억되듯.

그러나 사찰은 이명박 정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정치권 내부의 공방 거리에 그치지도 않을 것이다. 사찰이 이명박 정부로 인해 불거졌지만 그 이후로도 구조적이자 일상적 문제로 계속될 것이라는 데 이 문제의 진정한 심각성이 있다.

민간인 사찰에서 시민 사찰로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로, 국무총리실 사건 전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우리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부의 입장과 다른 견해를 표명하였다는 이유로 고통을 겪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가까이는 김미화씨와 KBS 블랙리스트 논란이 있었고, 그보다 일찌기 박원순 변호사와 국가정보원 사찰 논란이 있었다. 광우병 논란을 보도하여 촛불 시위의 불을 당겼던 MBC PD수첩이 이런 핍박의 첫 희생자일 것이다. 천안함 사건 당시 정부의 조사 결과와 다른 입장을 발표하거나 정부를 비판한 전문가나 단체의 경우도 예외없이 고소고발의 대상이 되었다.

모두 심각한 사건들이었지만,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정치권 내부와 ‘엘리트 민간인’에 대한 사찰 문제는 크게 보아 즉 현 지배권력이 정적을 다루는 방식의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결코 이것만은 아니다.

몇 년 동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사찰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국무총리실 사찰 논란의 출발이었던 김종익씨 사건에 ‘민간인 사찰’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그가 민간인 사찰의 유일한 당사자도 처음도 아니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국민은 사찰 논란의 관전자가 아니며 당사자이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촛불, 광우병 괴담, 광고지면 불매운동, 미네르바, 회피 연아, 천안함 괴담, 그리고 쥐코 영상까지. 정부가 정색하고 덤벼들기에는 면이 서지 않는 일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일들이었지만, 모두가 정색하고 벌어졌다. 어떤 일들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지만, 형사처벌 앞에서는 아무도 웃을 수 없다. 과거에도 ‘막걸리 보안법’이나 일반 시민이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 횡행하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일반 시민 다수를 아우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 7월 14일 ‘최근 (이명박 정부의) 공안탄압 양상과 대응방향 모색을 위한 토론회’라는 제하의 토론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저강도 공포의 일상화’, ‘저강도·맞춤형 공안탄압’이라는 단어였다. 이명박 정부의 공안 통치를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과거 회귀’를 말했다. 토건국가식 경기부양책이나 경찰의 고문 수사에서, 박통이나 전통 등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스타일 간에 유사점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공안 탄압은, 매우 치밀하고 집요하게, 그리고 치사하게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일반 시민에 대한 공안 탄압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인터넷 사찰이다. 인터넷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 누구에게나 주어진 표현 수단이고, 그만큼 일반 시민에게 주류 매체 못지않은 권력이 부여되었지만, 일반 시민에 대한 권력의 감시와 탄압도 그만큼의 비중을 두고 이루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인터넷 시대 초기에는 표현물의 양이 너무 많아서 이제 권력이 여론을 유린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기술낙관주의가 지배적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낙관할 수 없다. 경찰과 정부에는 감시 맞춤형 검색엔진과 전문업체가 있다.

경찰이 실시간 인터넷순찰시스템, 즉 ‘사이버 검색·수집 시스템’을 발주하여 인터넷을 감시한다는 사실이 경향신문에 보도된 것이 지난 해 9월이다. 올 7월 세계일보는 정부와 대기업이 전문업체를 통해 4만2000개에 달하는 인터넷 게시판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감시의 결과는 무엇일까? 2008년 국정감사에서 민주당 장세환 의원이 문화부에 대해서만 밝힌 사실만 해도, 하루 두 차례씩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인터넷 게시물을 모니터링해 청와대·대검찰청·경찰청·방통위 등 42개 정부부처가 공유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공유된 누리꾼의 아이디 규모가 7~800개에 이른다고 했다. 김종익씨의 경우 그 피해가 극적이고 구체적이어서 특히 화제가 되었지만, 그 못지않은 피해가 또 있을 것이다.

‘사찰’은, 단순히 조사하여 살핀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가나 기업과 같은 권력기구가 자신에 대하여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개인들의 ‘사상적 동태’를 은밀히 조사하고 처리한다는 말이다. 실제 그런 일을 담당하였던 경찰의 한 직분을 의미하기도 하였다(사상경찰).

시민 사찰의 메카니즘

좀 더 자세한 인터넷 사찰의 메커니즘은 이러할 것이다. 검색엔진의 힘을 빌려 ‘쥐코’ 등 문제가 되는 검색어를 포함한 게시물을 발견한다. 게시물을 발견하면 당국이 그 작성자의 신상정보를 알아내기란 식은 죽 먹기이다. 현행 법률에서는 수사기관이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등 ‘통신자료’를 요구하는 데 영장을 요구하지 않는다(개정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수사기관은 간단히 사유를 적은 서면 요청만으로도 통신자료를 손쉽게 요구할 수 있다. 때문에 얼마 전 참여연대 공익법센터가 ‘통신자료제공’에 대하여 영장주의 위반 등의 문제를 지적하며 위헌소송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제공 규모는 어마어마하고 매년 증가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집계하여 발표하는 통계만으로도 인터넷 통신자료 제공의 규모가 2008년 119,280건(문서), 2009년 143,179건(문서)이다. 2009년의 경우 하루 근 문서 400개 꼴로 인터넷 이용자의 신상정보가 제공되었다는 말이다. 방송통신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문서당 평균 12.7개의 아이디가 포함되어 있으니 하루 약 5,000개 아이디의 신상정보가 제공되고 있다. 모두 범죄수사와 정의 구현을 위하여 꼭 필요한 신상 제공이라고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통신자료 제공의 요건이 법률로 딱히 규정된 바가 없으니 수사기관 뿐 아니라 국무총리실 같은 정부부처에도 제공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단 주목 대상이 되고 신상이 알려지면 순식간에 당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널리 애용되는 방법은 이메일 압수수색이다. 그런 통계는 관리하지 않는다고 법무부가 버티고 있어서 그 정확한 실태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매우 광범위한 규모의 이메일 압수수색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메일 압수수색에는 법원의 영장이 필요하지만 법원이 그 견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2009년 주경복 전 교육감 후보의 7년치 이메일이 압수수색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었고, 검찰은 압수한 PD수첩 작가가 대통령이 싫다고 쓴 이메일 내용을 공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주경복씨나 PD수첩 작가가 아니어도 수많은 네티즌들의 이메일이 광범위하게 공개되고 있다. 2010년 5월 경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의견을 올렸던 네티즌들 다수가 사건 발생 시점보다 훨씬 전인 2009년 1월부터 이메일이 압수수색되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이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이메일에서 나타난 사상을 검증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른바 ‘사상 검증’, 곧 사찰이다.

이메일만 검증되는 것이 아니다. 2010년 벽두에 우리를 놀라게 했던 민주노동당 압수수색 사건의 경우에는, 경찰이 PC방으로 갔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하나씩 입력하는 방식으로 민주노동당 서버에 그 사람인 척 인증해서 해당인의 투표 기록을 열람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것을 ‘원격 압수수색검증’이라고 불렀고 법원은 영장을 내주었다. 이런 방식이면 투표 기록만 볼 수 있겠는가. 메일도 열어보고, 쪽지도 열어보고, 구매내역도 보고, 신용카드 사용내역도 볼 수 있다. 인터넷 시대에 원격으로 보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신이 검증 대상으로 편입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순간은 글을 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인터넷 사찰은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발생하지 않는다. 당신의 글 안에 그들이 염두에 두는 검색어를 포함되어 있을 때 당신은 그들의 검색 엔진에 포착된다. 당신의 인터넷 생활 그 자체가 사찰의 대상이다. 당신이 자발적으로 작성하여 공개적으로 올린 게시판, 카페, 블로그, 소셜네트워크에서의 모든 글이 사찰된다. 이것이 인터넷 시대 그들이 당신의 사상을 검증하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인터넷 생활을 빼놓고 사회생활을 할 수는 없는 시대가 되었으니, 바야흐로 상시 감시사회의 비극이 이렇게 도래하게 되었다.

일상적 사찰

이제 사찰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공포가 퍼지고 있다. 나도 사찰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시민들의 공포는 매우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공포가 위축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글을 올릴 때 느끼는 심리적인 위축은 민주주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소리내어 비판할 수 없다면, 비판할 때마다 감시의 시선과 그로 인한 댓가를 셈해봐야 한다면, 그것을 민주사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문제는 간단치 않다. 우리가 그러한 감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기술 환경에서 기꺼이 그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부터 전자주민증이 도입되면, 이제 그 기술 환경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전반으로 확장될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밝힌대로라면 앞으로 병원, 은행, 이동통신대리점, 법무사, 중개사 사무소를 갈 때마다 ‘삑~’하고 전자주민증을 대거나 지문을 인식해야 한다. 정부는 전자주민증 리더기를 공공기관은 물론 더 많은 기업체가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앞으로는 내가 언제, 어디를, 무엇 때문에 방문했는지의 행적이 전자주민증과 함께 디지털 족적(digital footprint)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인터넷 신상정보나 이메일처럼 누군가에게 제공될 것이다. 데이터베이스 감시사회(database state)의 등장이다.

호들갑처럼 보이는가? 내가 보기에, 일상적인 사찰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 이 글은 2010.7.26.자 미디어스에 기고한 졸고 “당신의 인터넷 생활 자체가 사찰 대상이다”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2010.12.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