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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 강화로 이용자의 권리와 공공성이 후퇴하게 될 위험성 높아{/}자유무역협정, 각국의 자율적인 문화 정책의 걸림돌

By 2004/06/08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집중분석

오병일

한·칠레 FTA 자체는 지적재산권과 관련해서 상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협정은 기본적으로 WTO 지적재산권협정(이하 TRIPS)에 기반을 두고 TRIPS 보다 더 강력한 보호를 가능하게 했으며, 상표 및 지리적 표시의 보호에 관한 추가 조항을 두고 있다(이를 TRIPS plus 방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칠레 FTA를 시발로, 한·일 FTA, 한·싱가폴 FTA 등 추가적인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어, FTA 협상을 통한 지적재산권 보호가 점점 더 강화될 전망이다.

FTA, 이용자의 권리 제한 우려

FTA의 지적재산권 조항이 어떠한 내용을 포함할 것인지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미주자유무역지대(이하 FTAA)의 지적재산권 조항을 보면 알 수 있다. WTO TRIPS는 1995년 발효됐는데, FTAA는 95년 이후의 지적재산권 관련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96년에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서 채택한 저작권 조약과 실연음반 조약이다. 이 두 조약은 디지털 환경에서의 저작권 보호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일명 ‘디지털 신조약’으로도 일컬어진다. 구체적으로는 ▶공중전달권(예를 들어,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파일을 올리거나 내려받는 것을 공중전달권으로 규제할 수 있다) 부여 ▶암호를 깨는 기술이라든가,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기술을 규제하기 위한 기술적 보호조치 조항 ▶컴퓨터 기억장치에 일시적으로만 저장되는 것도 복제의 개념에 포함시키는 조항 ▶실연자나 음반 제작자와 같은 저작인접권자의 배포권 인정 등이 있다.

미국의 시민단체 IP Justice(http://www.ipjustice.org)는 ‘FTAA의 지적재산권 장(章)을 삭제해야 할 10가지 이유’라는 문서에서, FTAA의 지적재산권 조항이 음악 파일을 공유하는 수백 만의 시민들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위협하고 있으며, 기술적 보호조치 조항을 통해 과학적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데이터베이스와 같이 이전에는 저작권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실(Fact)과 과학적 데이터에도 저작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저작권 위반 혐의자의 이름을 사법적인 판단없이 저작권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용자의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갈수록 길어지는 보호기간, 축소되는 공유정보

또 다른 문제는 권리의 보호기간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TRIPS에서는 저작권 보호 기간을 저작자 사후 50년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FTAA는 이를 70년, 자연인이 아닌 경우에는 95년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상표권의 경우에도 TRIPS에서는 7년인데 FTAA에서는 10년으로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지식과 정보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공공재로써, 저작권을 통해 ‘일시적으로’ 창작자에게 독점적인 권리를 부여하지만, 보호기간이 끝나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보호기간이 늘어나면, 그만큼 지식의 공적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게 된다. 애초에 저작권 보호기간이 14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작권 보호기간이 현재 얼마나 확대되었는지 알 수 있다.

지적재산권의 집행이 강화될 가능성 커져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우리가 체결하는 FTA에 위와 같은 조항이 포함되더라도 WTO에 가입할 때와 같은 급격한 충격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WTO에 가입하면서 한국의 지적재산권 법제는 TRIPS를 수용한 골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TRIPS 이후의 쟁점들도 계속된 법제 개정을 통해 이미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WIPO 저작권 조약에 가입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 내용을 국내 저작권법에 반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2004년 3월 24일 WIPO 저작권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3개월 후인 6월 24일부터 가입국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게된다. 따라서 법제의 개정을 통해서보다는, 외국 정부나 기업을 통한 ‘실제 집행의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이 크다. 2004년 3월 주한유렵연합상공회의소의 지적재산권위원회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법제 정비 및 개선은 WTO/TRIPS 등 국제적 규범에 비교하여 상당한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한국 당국의 집행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FTA의 지적재산권 조항이 미칠 수 있는 가장 큰 부정적 영향은 이와 같은 국제 협정이 많아질수록 자국의 자율적인 정책을 시행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이미 한국의 정부 관료들은 저작권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국제협정 때문에 국내법을 바꿀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놓기 일쑤다. 그런데 저작권법이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지식이나 문화는 단지 ‘산업’으로만은 볼 수 없는 영역이다. 즉, ‘시장 논리’에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공공 정책이 시행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스크린쿼터 제도와 같이 시장 개방의 요구에 맞서 ‘문화적 예외’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TRIPS에 이어 수많은 FTA가 체결되면, 국내의 지식·문화 정책은 한국 민중의 요구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기업이나 정부 관료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200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