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버시

사찰과 시민 감시

By 2012/04/23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총선이 끝나자 그 결과를 납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개탄했다. “사찰보다 막말이 중요한가?” 실제로 총선 결과 혹은 그에 대한 보도들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진보 진영이 사찰을 잘못된 프레임에 가두어 온 데서 자초되었다. 사찰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문제로 보는 것이다. 김종익씨 사건에 대한 폭로 이후 진보 진영은 줄곧 “사찰 = MB”의 프레임으로 문제를 조망하고자 했다. 물론 국무총리실의 법외적인 사찰의 몸통은 청와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고, 그에 대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다는 정황이 드러난 이상, MB가 책임질 일은 틀림없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으로는 총선 정국에서 이미 대중적으로 MB와 어느 정도 ‘차별화’해 버린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책임을 물 일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라는 암시는 빛을 바래 버렸다. 문재인 당시 후보의 말대로, 노무현 정부 하에서 현대자동차 노조 동향에 관한 보고, 화물연대에 관한 보고, 전공노 동향에 관한 보고가 일선 경찰의 정보보고이기 때문에 합법이고 문제가 없다는 식의 프레임으로는, “누가 되어도 바뀔 게 없다”는 인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선거 막판에 사찰 문제가 ‘감찰’이냐 ‘사찰’이냐의 쟁점으로 좁혀져 버린 까닭은 우리 스스로 사찰을 대통령의 스타일 문제로 국한해 왔기 때문이다.

사찰의 문제는 정치적 계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다. 사찰의 ‘해법’을 대통령 개인의 선의에 맡겨둘 수는 없다. MB 정부 들어 일어난 수많은 감시와 표현의 자유 침해는 개악된 법제도 하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원래부터 버젓이 있어 왔던 법제도 하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우리는 이를 ‘오남용’이라고 불러 왔다. PD수첩이나 미네르바 사건처럼 일부는 법원에 의해 바로 잡히기도 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잡힐 일이라거나,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남용을 ‘덜 하는’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말일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누가 해도 문제는 문제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해도 문제가 없도록 이참에 법과 제도를 확실히 손보아야 한다. 국가의 시민 감시는 국가 그 자체의 속성이다. 사찰기관은 그 자체의 논리로 계속 굴러가서 때로 그 운용이 통치자 개인의 의지를 넘어서기도 한다. 에셜런이 그러했다. 한국에서는 논란이 미미했지만, 최근 해외에서는 ‘에셜런’의 정보 유출 문제가 꽤 큰 파문을 불러 왔다. 에셜런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정보기관들이 함께 운영해 온 감시망이지만, 1973년까지는 선출직 호주 총리도 그 존재를 몰랐었다고 한다. 행정부의 수반이 개혁적이라고 해서, 민주정부라고 해서 사찰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몽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몽상을 꾸어 왔다. 2005년 안기부 X파일 파문이 나라를 뒤흔들었지만 파문만으로 그쳤다. 국가정보원은 CAS, R2 등 불법으로 제조하여 사용했던 휴대전화 감청기계를 파기했다고 주장했고 우리는 그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 몇몇 책임자를 사법처리하였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휴대전화 감청을 금지하지도 않았고, 국가정보원의 감청 권한을 손보지도 않았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정부는 휴대전화 감청을 하고 있지 않다는 공식 통계를 발표해 왔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들의 책임 선으로 규정했을 때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릴 수 밖에 없다.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국무총리실 공직윤리감찰이나 국가정보원을 통째로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구조의 문제를 따져 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국무총리실, 그리고 예능 담당 직원이 있었다는 국가정보원이 사찰에 사용했던 방법이 궁금하다. 미행으로 끝났을까? 불법 녹취는 없었을까? 불법 개인정보 제공은 없었을까?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맘 먹으면 개인의 모든 행적이 투명하게 추적된다. 일일히 쫓아다닐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는 전자 미행 제도가 이미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서비스 들은 나의 소중한 사회관계망을 관리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그것을 누군가 감시하면 나의 생각 뿐 아니라 나의 인적 관계까지 한방에 알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 검찰이 월스트리트 시위대의 트위터를 털어 논란을 빚었지만, 똑같은 일이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내 인터넷에 올린 글의 임자가 알고 싶으면 포털에 연락하면 된다. <전기통신사업법>상 신상정보 제공 의무는 없지만 포털로서는 수사기관에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신상에 좋다. 인터넷 실명제로 이미 이용자의 이름과 주민번호가 다 수집되어 있고 마케팅용으로도 쓰고 있으니 잡아떼기도 쉽지 않다.

휴대전화 위치는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 수사기관이 손쉽게 제공받아 왔다. 특히 실시간 위치정보는, 종로3가->종로2가->종로1가 하는 식으로 매 십분 간격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통신회사가 수사관에게 실시간 문자메시지로 보내준다. 희망버스 사건으로 기소된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에 이런 식의 추적이 이루어져 왔다.

어떤 장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궁금할 때는 기지국을 털면 된다. 반값 등록금 집회를 하는 대학생이 누구누구인지는 청계천 인근 기지국을 털면 된다. 한 기지국당 통상 신호가 12,000개씩 잡히니까 몇 개를 털면 십만에 가까운 시민들의 휴대전화 번호가 털린다. 그중 대부분은 반값 등록금 집회와 관계없는 무고한 시민들이겠지만 이 정도 수사 협조는 불가피하다고 경찰 마음대로 결론을 내고 법원의 결재를 받으면 방법이 없다.

굳이 공공기관이 설치하지 않았어도 어디 가도 하나쯤 있는 CCTV도 경찰력을 대행하고 있다. 제공받는데 영장도 필요 없으니 국무총리실은 물론 언론 기관들도 찍힌 사람들 의사와 무관하게 마구 제공받아 때로는 사람이 버스에 치여 죽는 장면이나 장례식장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장면이 인터넷에, TV에 볼거리로 제공된다.

행적을 추적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가 거쳐가는 거의 대부분의 장소에서 사용되는 금융카드들이다. 신용카드, 직불카드는 물론 교통카드까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소상한 내역이 영장 없이 제공되곤 한다. 전자주민증이 시행되면 금융 거래가 없어도 신분증을 제시했던 곳의 정보가 제공될 것이다. 동사무소에 들르거나 병원에 들르거나 은행에 들르거나. 외국에서는 청소년 여부를 확인한다는 미명하에 편의점 등에서 전자주민증을 긁게 하는 데 대한 감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불법적인 ‘사찰’이건 합법적인 ‘감찰’이건 수사기관이 영장도 없이, 심지어 수사기관도 아닌 곳들이 이런 전자 미행을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경찰이나 국가정보원, 공직윤리지원관실 등 명분을 가진 공공기관이라 하더라도 자기 직무를 넘어서는 정보 수집 자체는 확실히 금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행 법률로는 이런 일들을 제한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손 볼 곳이 많다.

왜 우리는 단호하지 못했는가? 왜 불법사찰 금지법 논의가 박근혜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었는가?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다. 사찰 논란의 프레임은 이런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 월간 <참여사회> 5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2-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