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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성적 표현인가 인권침해인가

By 2004/06/0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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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시민과 변호사』 2002년 8월호에 게재된 것임.

포르노, 성적 표현인가 인권침해인가

박선영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위원. 법학박사)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눈앞에 둔 어느 날, 나는 친구의 권유로 ‘포르노와 매춘문제 연구회’ 주최의 토론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이날의 모임은 주최측이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는 포르노비디오 중에서 여성비하가 노골적인 포르노를 선정, 그것을 편집하여 상영한 후에 참석자 모두가 포르노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는 장이었다.
그때 상영된 포르노비디오 중 하나는 내 눈에는 여성 출연자가 실제로 강간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이 강간당하는 실제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 그것도 아주 폭력적으로 강간당하는 모습에 나는 경악했다. 나는 그날의 충격으로 며칠간 내가 강간당하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귀국 후 나는 우리 사회의 인터넷 발전 속도에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인터넷 정보의 70%가 음란물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손쉽게 포르노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포르노가 일상화되어 버린 현실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중학생인 아들이 인터넷을 통해 포르노를 보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는 친구의 고민은 우리 사회에서 자식을 둔 부모의 공통된 고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리기 때문에 포르노를 보면 안 된다는 당위보다 포르노를 통해 우리 아이들이 성에 대해 어떤 것을 학습하고 있는가 이다. 이것은 성인 남녀에게도 해당되는 물음이다.
이번 호에서는 일상의 문제가 되어 버린 포르노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성적 표현에 대한 법의 시각을 살펴본 후에 포르노란 무엇이며, 포르노가 문제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포르노에 대한 규제가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되는가 등을 살펴본다.

성적 표현에 대한 법의 시각

형법에 의하면 특정의 성적 표현이 음란물에 해당되는 경우, 이를 유포시키거나 만드는 등의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즉, 형법은 음란한 문서·도화·필름 기타 물건에 대해서 반포, 판매, 기타 임대하거나 공공연히 전시 또는 상영하는 경우(제243조)뿐 아니라 동 목적으로 제조, 소지, 수입, 수출하는 경우(제244조)까지를 규제하고 있다. 규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음란물로서 이때 문제되는 것은 음란성에 대한 정의와 음란물의 판단기준이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 여부가 다투어진 사건에서 대법원은 ‘음란’이란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침해하기에 적합한 것을 가리킨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음란의 판단기준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하되 그 사회의 평균인의 입장에서 문서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규범적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며,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00. 10. 27. 선고 98도679 판결).
음란성 여부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은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풍속이라는 잣대로 음란성 여부를 판단하는 것으로 그 개념이 매우 추상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또한 ‘성적 수치심’은 개인의 주관적 감성을 의미하는 반면 ‘도의 관념’은 규범적인 개념으로 양자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평균인을 기준으로 음란성의 허용한계를 규정하려는 판례의 태도는 평균인이란 동일한 가치판단을 한다는 가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평균인을 누구로 볼 것인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치판단이란 성별, 연령별로 큰 차이가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음란성 여부는 재판관의 판단에 의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음란성의 개념은 헌법이 요구하는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비판되고 있다.
음란물에 대한 우리 법원의 판단기준과는 달리 외국의 경우는 음란성의 판단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음란성 판단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밀러(Miller) 판결은 음란물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평균인이 현재사회의 기준을 적용했을 경우에 작품이 전체로서 성욕을 자극하는 것으로 판단될 것, 명백히 도발적인 방법으로 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정의된 성행위 등을 묘사한 것일 것, 작품이 전체적으로 중대한 문학적·예술적·정치적 또는 과학적 가치를 결여하고 있을 것 등을 제시하였다. 당시의 버거 대법원장은 이러한 부류의 표현을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로 규정하였다(Miller v. California, 413 U.S 15 (1973)).

포르노―성적 표현인가 인권침해인가

우리 사회에서 성적 표현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중에는 포르노라고 불리는 성적 표현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포르노란 용어는 포르노그라피의 약어로, 그리스어로 ‘pornoi(창녀)’와 ‘graphos(문서)’의 합성어인데, 성적인 행동의 묘사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에는 보다 좁은 의미인, 성적 자극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도한 묘사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르노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포르노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은 포르노의 무엇을 문제시할 것인가에 대한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포르노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육체 또는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거나 서술하여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위해 이용되는 표현물’로 정의된다. 이상의 정의는 포르노를 노골적인 성적 표현물로서 바라보는 것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골적인 성적표현이 도덕상 허용될 수 있느냐’이다. 이런 몰성적, 도덕적 관념으로서의 포르노 정의에 전면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 여성주의자들이다. 맥키논은 포르노를 "영상과 언어를 통해 여성을 종속시키려는 생생한 성적 묘사물"로 정의하고, 포르노를 성적 표현의 노골성이 아닌 포르노 속에서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에 주목한다.
맥키논과 같이 포르노를 정의할 경우 포르노는 기존의 음란성과는 대비된다. 음란은 도덕적인 관념인 반면 포르노는 ‘정치적인 실천’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음란성은 성도덕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정의되는 반면, 포르노는 여성의 인권을 훼손하고 여성차별을 조장하는 것으로 이런 차별을 배제하기 위한 정치적 실천의 관점에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당사자의 인격적 존엄이 존중되는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포르노에 해당되지 않는다.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의 유해성에 주목하여 법규제를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표현으로 포르노를 보는 것에 의해 여성차별의식을 형성·강화시키고 사회생활에서 여성의 지위를 저하시킨다. 둘째, 포르노는 성적 폭력이 죄악이라고 하는 의식을 마비시켜 그 결과 여성에 대한 성범죄와 모욕적인 성적 행동을 유발한다. 셋째, 포르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모델이 된 여성은 성적 학대 등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넷째, 포르노는 여성을 인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닌 물건으로 취급함으로써 여성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는 심리적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포르노에서 보여지는 여성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성적 대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평등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능한 것이다. 인간과 물건과는 평등할 수 없다. 그런데 포르노에서 그려지는 여성은 성적 대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런 포르노는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성차별적 표현이다. 사실, 우리의 경우 이른바 "포르노"라고 불리는 매체는 법적으로 규제되고 있기 때문에 포르노 규제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포르노를 규제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포르노=음란물로 보기 때문이다. 음란물로서 포르노를 바라보는 시각은 포르노가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성차별 표현이라는 시각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필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음란성을 성적 수치심과 도의적 관념으로 판단하는 판례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규제되어야 할 성적 표현은 노골적인 성적 표현이 아니라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성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와 표현의 자유

음란물에 대한 형벌조항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있듯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는 포르노를 규제하자는 것에 대해, 이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이 국가로부터 탄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권리를 보장한 것으로,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포르노가 표현의 자유에 의해 보장된다면, 이는 여성이 민주주의 사회의 대등한 일원이 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여성을 이류시민화 하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끝으로, 포르노 옹호론자의 견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치려고 한다.
포르노 옹호론자는 포르노의 유해성 주장에 대해, 포르노란 인간의 억압된 성적 욕망과 성에 대한 금기와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단지 말이나 그림일 뿐이고 영화처럼 보는 순간 끝나고 마는 경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포르노는 매매춘이나 마약 복용과 같이 ‘피해자 없는 범죄’라는 것이다.
필자는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성적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문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글이나 영상을 통해 간접경험이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포르노를 본다는 경험은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학습된다. 즉, 인지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라는 모르건(Morgan)의 주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지점에서 음미의 가치가 있다.
‘피해자 없는 범죄’라는 주장의 근거는, 포르노를 볼 것인가의 여부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로 포르노를 보는 것은 사회에 어떠한 해악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도죄나 폭행죄는 피해자의 존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범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포르노는 피해자 없는 범죄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포르노가 피해자 없는 범죄인가?’
A라는 직장에서 근무하는 B라는 남성은 여성을 비하하는 차별적인 발언을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자주 한다. 이 말을 들은 여성 중 C는 B의 여성차별적 발언에 깊은 상처를 받고 B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것 자체가 괴로워 직장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B의 반복적인 여성비하적 발언은 환경형 성희롱에 해당되어 C는 B의 성희롱의 피해로부터 구제될 수 있다. 성희롱에 대한 이런 예는 포르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포르노를 통해 명예가 훼손된 여성이 구제될 수 있는 길은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200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