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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 의미{/}시민들이 만든 전력정책의 미래

By 2004/12/06 10월 25th, 2016 No Comments

기획

김병수

우리 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이 과학기술이나 환경과 관련된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는 모습은 그리 흔하지 않다. 아직도 많은 전문가들과 관료들은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 갈등의 원인을 대중의 무지와 외부의 개입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과학적 소양이 부족한 시민들로 인해 또는 언론이나 운동단체와 같은 외부 개입으로 인해, 과학적 또는 기술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가 꼬여 갈등이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갈등의 원인을 이렇게 파악하다 보니 일반인들은 홍보나 계몽의 대상이 되어 왔고, 관련 의사결정은 일부 전문가들과 관료들의 몫이었다.

합의회의, 단순한 홍보와 계몽 아닌 사회적 학습

그런데 이런 사회적 통념들을 조금씩 허무는 시도들이 국내에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개최된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이하 합의회의)’가 대표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합의회의는 선발된 16명 내외의 보통 시민들이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전문가들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뒤, 학습과 상호토론을 통해 내부 의견을 통일해 자신들의 견해를 발표하는 제도다.

1987년 덴마크에서 처음 시작된 이 제도는 1990년대 초 네덜란드와 영국에 도입된 것을 필두로 해서 오스트리아, 프랑스, 노르웨이, 스위스, 캐나다,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이스라엘, 일본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나라에서 다룬 주제는 유전자 조작식품, 생명복제, 유전자 치료, 전자주민카드, 교통문제, 핵 폐기장 선정 문제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55건 이상의 합의회의가 개최되었고 국내에서도 지난 1998년(유전자조작식품)과 1999년(생명복제기술)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된 바 있다.

이번 합의회의는 그 동안 두 번의 합의회의를 실질적으로 진행했던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개최하였다. 작년 부안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핵 폐기장 부지 선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18년 이상 지속되고 있지만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부지선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격렬한 저항은 1차적으로 결정 과정의 폐쇄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정부는 폐기장 부지 선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민투표 도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문제는 절차적 정당성 확보만으로는 사회적 갈등이 해결되기 힘든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폐기장 부지 선정 과정을 둘러싼 격렬한 갈등의 이면에는 현재의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을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지선정을 둘러싼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민 의견수렴과 같은 절차적 정당성 확보만으로는 부족하며, 국가 전력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원자력 중심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이 공론화 돼 단순한 홍보와 계몽이 아닌 사회적 학습이 촉진될 것으로 기대했다.

합의회의 성공여부는 중립성

합의회의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진행의 중립성이었다. 특히 이번 주제처럼 이해관계자가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갈등이 첨예한 경유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합의회의를 중립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원자력계, 환경단체 인사 등으로 조정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시민패널 모집과 선정, 시민패널들에게 제공할 자료 및 전문가 패널 선정 등이 논의되었다.

합의회의에 참석할 시민패널들은 지난 6-7월에 언론 광고를 통해 모집됐다. 전국에서 176명의 시민들이 신청했는데 최종적으로 주부, 학생, 퇴직교사, 회사원, 연구원 등이 포함된 16명의 시민이 선정되었다. 물론 직접적 이해관계자들은 배제되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시민패널들은 본 행사 전에 두 번의 예비모임을 가졌다. 비공개로 진행된 예비모임에서 시민패널들은 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고 밤늦게까지 상호 토론 한 후, 본 행사 때 전문가 패널들에게 질문하고 합의할 문항들을 추려내고 다듬는 작업을 했다. 약 3개월 동안 사전 학습과 토론을 거친 시민패널들은 3박 4일 일정의 본 회의에 참가해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시민패널들은 8일과 9일 상반된 입장을 가진 11명의 전문가패널과 2명의 지역주민의 발표를 들었다. 9일 오후에는 시민패널과 전문가패널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추가적인 질의응답 및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이 끝난 뒤 시민패널은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거쳐 조별 토론과 전체회의를 지속적으로 진행하였고 10일 오후에는 핵심 쟁점인 원자력 발전 지속여부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11일 오전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원자력 발전소 신규 건설 중단’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시민패널보고서를 발표했다. 현 시점에서 당장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전력원은 찾기 힘들지만 중장기적으로 수요관리와 신재생에너지 개발을 통해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와 같은 정책을 계속 추진한다면 원자력 발전 중심의 전력정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반 시민,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판단 능력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합의회의에서도 일반 시민들은 균형 잡힌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는다면, 과학기술정책과 같은 어려운 쟁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평범한 시민들이 현재의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제대로 엿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이번 합의회의의 과정과 결과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원전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 기구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단순 설문조사, 위원회 구성, 공청회 개최와 같은 형식적 참여 제도를 통한 정책결정 과정에서 벗어나, 합의회의와 같은 보다 직접적인 시민참여 제도를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합의회의를 비롯한 몇몇 시민참여 제도는 사회적 갈등 사안에 대한 합의 촉진 기능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사회적 수용 전에 그 기술이 가져올 문제점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일종의 기술영향평가로써의 기능도 가지고 있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200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