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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선거, 민주주의의 희망인가 선거원칙의 종말인가

By 2004/09/08 10월 25th, 2016 No Comments

기획연재

장여경

집에서 투표할 수 있으면 참으로 편리하고 좋을 것이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투표소까지 이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전자투표 혹은 전자선거의 실현은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오랜 기대 중 하나였다. 투표의 편의성 확대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다. 최근 투표율의 저하, 특히 젊은 층의 정치적 무관심이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위 ‘참여’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서는 전자선거가 한시바삐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투표 참여 확대를 기대

최근 거론되는 전자선거는 집이나 직장에서 인터넷을 이용해 원격으로 투표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영국이 지난해 5월 지방선거에서 이 방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면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17개 지방선거구 약 16만 명이 인터넷, 디지털TV, 휴대폰 메일, 전용 키오스크단말기 등을 이용해 투표에 참가했다고 한다. 영국 선거위원회는 이러한 전자투표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 기회를 제공하고 투표율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럽 지역에서는 영국 외에도 스웨덴, 프랑스 등이 인터넷을 이용한 선거나 유사한 방식의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지난해 8월 `참여정부의 전자정부 로드맵‘에서 올해부터 전자투표·선거제를 순차적으로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던 바 있다.

그러나 이런 도입 붐에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개인정보 누출, 데이터 조작 등의 이유에서이다. 특히 개개인의 투표 내용에 대한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첨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다고는 하지만 컴퓨터를 이용해 신원을 확인하고 투표하는 과정에서 해킹이나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또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투표하는 등 부정과 조작을 막을 방도도 없다. 결국 비밀 선거 원칙 뿐 아니라 1인 1표라는 평등 선거 원칙도 보장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미국은 지난 2002년 전국적으로 전자투표기를 확보한다는 내용의 ‘선거제도개혁법’을 통과시켰지만 아직 실제 선거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1996년 총선에서 팩스를 이용한 부재자 투표를 실시하면서 비밀보장 포기각서를 제출받은 적이 있다. 원격선거에서 비밀투표는 완전히 보장될 수 없음을 명백히 인정한 것이다.

비밀 투표와 1인 1표가 보장되지 않는다

영국 역시 올 6월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되는 유럽연합 의회선거와 지방선거에 전자투표를 도입할 계획이었지만 유보하였다. 스위스 의회는 최근 제출된 국민전자투표에 관한 제안을 부결시켰다.

여러 전문가들은 전자 투표 시스템, 특히 원격 투표 시스템의 안전성에 대해 우려를 제기해 왔다. 선거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으면 지배 계급은 국민 개인이 어떠한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는지를 파악하여 통제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선거 결과가 뒤바뀔 수도 있는데 이 사실을 감지하기조차 힘들지 모른다. 런던 정보정책리서치재단의 이안 브라운은 “가정용 PC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투표 시스템으로 적합한 플랫폼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프라이버시 단체와 전문가, 시민들은 지난해 <투표 보전을 위한 전국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http://votingintegrity.org)

지난 7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행정학회·국제행정교육기관협의회 공동학술대회에서 한스 피터 함부르크대 교수는 전자선거는 기존의 전통적 선거방법의 보조적인 방식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전자선거가 각국의 헌법과 세계인권선언에 부합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또 컴퓨터기술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 투표 행위의 격차가 발생한다.

특히 그는 전통적인 선거방법에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교육적 요소가 포함돼 있음을 강조했다. 투표소의 분위기, 기표박스로 들어 갈 때의 상황 등 투표소에서의 행위를 통해 오랜 전통의 민주주의 가치가 교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 문제를 기술적 수단으로 해결하려는 최근 추세에 매우 따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 선거가 비용과 시간 면에서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주의 교육까지 대신할 수 있을까? 컴퓨터가 눈앞에 있다고 하여 정치에 염증을 느끼는 젊은 층의 투표율이 획기적으로 정말 올라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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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투표에 대한 실험들

세계 여러 나라는 일찍부터 다양한 기술을 투표에 접목해 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1977년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시의 워너 아멕스사가 도입한 ‘상호작용적 큐브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유선방송TV에 연결된 셋톱박스상의 5개 버튼을 이용해 방송 내용에 대해 실시간으로 투표할 수 있도록 했다.

1992년에는 전화를 이용한 원격투표가 등장했다.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주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7천 명의 당원들에게 비밀번호를 부여하고, 이를 이용해 전화 투표를 하도록 한 것이다. 전화를 이용한 투표는 1994년 뉴멕시코 예비선거에서도 부재자투표에 이용됐다.

한국에서도 2002년 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서 전자투표가 도입돼 터치스크린 방식의 키오스크 단말기가 사용됐다. 화면에 나타난 후보의 얼굴과 이름을 손가락으로 눌러 투표한 뒤 그 결과가 KT 통신망을 통해 선거관리위원회 서버에 집계되는 방식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당 선거 때마다 당원들이 핸드폰 인증을 통해 인터넷으로 투표하도록 하고 있다.

2004-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