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네트워커

죽은 자의 인권

By 2004/06/08 10월 25th, 2016 No Comments

독자기고

손상열

몇해 전 대인지뢰금지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다. 당시 지뢰금지운동을 하던 운동모임에서는 다리나 팔이 잘린 피해자들의 사진을 모아 사진집을 발간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함께 활동하던 친구와 논란을 벌인 일이 있다. 논란의 출발은 ‘과연 피해자들의 잘린 다리와 상처를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라는 것이었다.

공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질문을 받은 뒤로 한동안 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고통받아온 피해자의 몸을 운동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왠지 옳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뢰피해자의 고통과 삶을 우리가 공감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이 사진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당시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어떤 입장이 올바른 것인지 생각하기를 멈추었고, 그 사진을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전시하고 운동했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이와 비슷하게 ‘피해자의 몸을 담은 사진’이 공개되는 일을 여러 번 접하게 됐다. 미군에게 처참하게 희생당한 어느 여성의 주검사진,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은 중학생들의 주검사진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된 이라크인에 대한 성학대와 인권유린이 담긴 사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머리 속은 과거와 거의 유사한 질문으로 어지럽다. “과연 피해자의 몸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는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분노와 적개심만 자극한다면…

우선 이런 생각이 든다. ‘피해자의 몸’이 담긴 사진이 어떤 이미지로 구성되고, 또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하는 점이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의 몸’을 담은 사진이 순간적이며 원시적인 분노나 적개심을 자극하기 위해 배치되고 사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지 않을까? 미군에 희생당한 여성의 주검사진이나, 중학생들의 시신사진들이 그랬다.

이 사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군대와 그로 인해 피해자들이 겪어왔던 수많은 시간들 동안의 고통이나 피해자들을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다가서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로 다난했을 그녀들의 삶의 일부만을, 그중에서도 가장 끔직하고 처참한 측면만을 부각시키면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분노만을 연상시키는데 충실했다.

최근 언론과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접하게된 이라크인들에 대한 성적 학대 등을 담은 사진들을 보는 마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사들은 일제히 ‘또 어떤 사진이 있을까?’라는 식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경쟁적으로 사진을 보도했다. 몇몇 언론사들은 인터넷판 신문을 통해 아예 ‘미군의 이라크 포로학대 갤러리’를 운영하는가 하면, ‘개가 물고, 부상자 깔아뭉개고’라는 식의 선정적인 카피로 사람들의 눈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설정에서는 고문과 학대로 상처받은 사람들과 이를 멍든 가슴으로 지켜봐야 하는 이라크인들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단적인 예로, 그 많은 언론매체들이 ‘수개월 전’ 일어났던 고문사실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문제가 된 그 수용소에서 포로들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혹은 ‘이번 일로 인해 이라크 사람들의 정신적으로 얼마만큼 상처받았는지’에 관해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기사는 아무리 눈을 씻어도 찾을 수 가 없었다.

극단적인 자극은 오래가지 않는다

아마 이 대목에서 ‘전쟁의 실상에 대한 정보가 제공돼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진공개를 그냥 나쁘다고만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할 이가 있을 지 모르겠다. 사실 ‘피해자의 몸’이 어디까지 공개돼도 괜찮은 것인지, 어떤 것은 공개해선 안 되는 것인지 명확한 기준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나에겐 버거운 일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다. ‘처참한’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순간적인 자극과 분노에 익숙해질수록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은 점점 무뎌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자극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별다른 자극 없이 쉽게 눈에 띄지도 않는 여러 폭력에 무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자극이 만들어내는 분노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분노를 기반으로 한 운동은 분노를 일으키는 자극이 사라지는 순간 힘없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평화를 바라는 행동이 이런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좀더 끈질겨야 할 무엇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근본적으로 함께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종종 전쟁은 사상자의 통계와 사용되었던 무기들, 그리고 참혹함을 드러내는 사진들의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전쟁의 이미지는 그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워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나는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고 폭력의 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모든 활동은 이런 숫자나 통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상처들에 대해 공감하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물며 ‘피해자의 몸’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는 일에도 이런 피해자의 인권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0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