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와 생활협동조합, 그 문제의식에 관하여
단편선 (음악가,자유기고가)
#. 1
이를테면 우린 종종 이런 상황들과 맞딱뜨리게 되는 것이다. 어젯밤 공연이 끝나고 늦게까지 뒷풀이를 하다 친구 녀석 하나 데리고 새벽에 집에 들어온 아침. 살짝 숙취가 남은 상황에서 친구와 할머니가 차려주신 아침밥을 먹으며.
“(고시원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야, 집밥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고시원에선 밥하고 김치만 주잖아?”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할머니가) 아니, 고시원이면 무슨 고시공부라도 하고 있어요?” “(약간 뻘쭘해진 친구가) 아, 저 고시 보는 건 아니고 대구에서 올라와서 고시원에 살고 있는 거예요.” “(괜히 끼어들고 싶어서) 얘가 원래 음악하는 애인데요, 기타 되게 잘 쳐요. 서울에 밴드하려고 올라 온 거예요.” “(갑자기 시무룩해진 할머니) 아니, 밴드는 왜 한다냐? 음악은 취미로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잠시간 정적이 흐르고선.
“…그런데 우리 손자하곤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가?” “아유, 할머니. 홍대앞에서 음악하다가 알게된 친구에요.” “단편선이 홍대앞에선 아는 사람 그래도 많은 편이에요.” “아니, 음악을 해서 성공을 해야지 아는 사람만 많으면 뭐하나…”
2010년 12월 열린 두리반 투쟁 1주년 공연 – 단편선, [출처] <뉴타운컬쳐파티> 홈페이지(ntcp.kr)
뭐, 다 인정할 순 있겠다. 비단 음악 하는 사람만 겪는 문제겠는가? 나잇살 먹고선(그래봤자 스물여섯이지만) 집에 얹혀사는 손자에게 할머니가 취할 수 있는 태도란, 좌우지간 그런 것일 공산이 크다. 다만 문제는 어찌되었건 얹혀사는 것 빼곤 제 밥벌이 스스로 하는 손자를 아무 직업 없는 백수 내지는 한량 이상 이하도 아니라 생각한다는 것! 우리 할머니는 물론 이런 손자에게 밥을 차려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좋으신 분임은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불행히도 ‘음악가도 일종의 직업이다’라는 생각 자체를 가지지 못하신 분이기도 하다. 아니, 클래식이라면 또 몰라. 그런데 하필이면 인디라니! 그래서 음악가이자 자유기고가, 공연기획자, 활동가 등 여러 명패 아래 활동하고 있는 (백수가 아닌) ‘프리랜서’인 나는 왠지 집안에선 마치 제대로 된 직업이 없는 사람인양 계속 직업을 가지라는 압박을 받는 조금 이상한 상황이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할머니와 얹혀사는 손자라는, 가족관계로 얽혀있는 사이라 일반화시킬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겠으나 다른 사회적 관계를 상정해봐도 그 인식이란 게 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는 소위 ‘음악가’ 내지는 ‘음악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음악가도 일종의 직업이다’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경우가 둘로 나뉘긴 한다. 하나. 음악가는 예술가다. 다른 하나. 음악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가외’ 활동이다. 둘 사이엔 언뜻 간극이 있어 보이지만 실은 둘이 공모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가’라는 직업을 가장 앞에 내세우는 이로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이것이다. “다른 일 하면서 음악하면 되잖아?” 이렇게 말하는 바탕에는 몇 가지 전제가 깔린다. 하나. (창작과 연주를 포함한) 음악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잉여짓이다. 둘. 음악활동은 창조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활동이기 때문에 돈과 시간이 많이 들지 않는다(혹은 들일 필요가 없다). 셋. 잉여짓을 하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어쨌든 별로 쓸 데 없다. “생산적인 일을 하면서 음악을 하든 말든 해라!”
…이쯤에서 어떤 이들은 “물질 노동과 비물질 노동이 어쨌느니… 생산적인 노동과 생산적이지 않은 노동이… 노동의 개념이…” 같은 식으로 알아먹기 힘든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테지만 내 관심사는 아니다. 다만 앞서의 전제에 대해 몇 가지 할 말은 있다. 먼저 ‘음악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잉여짓’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음악가’라는 직업 자체가 엄밀하게는 ‘노동자’ 보다는 ‘자영업자’에 오히려 가까운 까닭에서다. 게다가 눈에 보이는 생산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억지로 “우리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라 우길 필요도 없겠다(어차피 사람 삶이 꼭 생산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문제는 다음. 음악활동이란 잉여짓이건 뭐건 간에 돈도 시간도 적잖이 든다는 것. 이를테면 악기를 사는 것부터도 문제지만 밴드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출 만큼의 실력을 쌓기 위해선 꽤 오랜 기간─이라 쓰고 최소한 3~4년 이상이라 읽는다─연습을 해야함은 물론 시간 당 대략 15,000원 선인 연습실을 빌리기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게다가 조그맣게 라도 음반을 만들 요량이라면 (통상적인 기준에 따라) 최소 300만 원에서 500만 원 정도의 돈과 몇 개월간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을 해봤자 잉여짓인 것을 크게 부정할 수도 없는 탓에 들인 노력에 대해 남들이 인정해줄 것이란 기대도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 당연히 ‘매니악’한 음악일수록, ‘마이너’한 장르일수록, 활동반경이 ‘인디’ 혹은 ‘언더그라운드’에 가까울수록 상황은 악화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운이 좋아 투잡을 할 수 있거나─요즘 같은 시대라면 가외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면서도 적절한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다는 것이 오히려 운이 좋은 것이 아닌가?─집에 돈이 많은 이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들은 온전히 개인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실제로 인디 씬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음악가들이 계약직 내지는 아르바이트 등 이른바 불안정노동에 종사해가며 번 생활비를 가지고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지만 다 ‘쓸 데 없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 쓸 데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쓸 데 없는 것들은 그럼 사라져야 하는가? 우리 음악가들의 삶은 없어져도 좋은 것인가?어디서나 희망은 젊음에서 나온다. 초기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조직했던 청년 운동가들이 시위 집결지에 대한 허위정보로 경찰의 감시와 방해를 따돌리고, 빈민 지역에서 50명으로 시위를 조직하여 해방광장에 도달할 때는 수천 명이 되었다. 반혁명세력이 무력을 휘두를 때 그들은 쇠망치로 돌을 깼고,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돌맹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늙은 야당 인사들은 현재 집권층에 의해 길들여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의 자세가 신선하다. 기독교도 여성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걸작이다. "제대로 된 정부이기만 하다면 원숭이가 대통령이라도 상관없다."
#. 2
“지역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음악가들의 생활협동조합”을 지향하고 있다는, 일명 “자립음악생산자조합.” 어찌되었건 우리가 선택한 우리의 삶─그것이 ‘매니악’하건 ‘마이너’하건 ‘인디’하건 ‘언더그라운드’하건 간에─이 비록 잉여짓에 불과하고 쓸 데 없는 것일지라도 우리에겐 그럼에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음악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고 싶다는 이유로 이름만 들어도 왠지 ‘운동’ 냄새 풀풀 나는 ‘조합’이란 것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합이란 것이 실은 별 것인가? 경쟁이 아닌 상생을 도모한다는 것. 협동과 협력을 바탕으로 모두가 주인이 되어 운영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연주하고 리스너들과 만나고 삶을 살아갈 바탕이 될 장(field)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것.
2010년 12월 열린 두리반 투쟁 1주년 공연 –한받, [출처] <뉴타운컬쳐파티> 홈페이지(ntcp.kr)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될 키워드는 ‘장(field)’이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에게 더 많은 언더그라운드를!"이란 모토를 내세웠던 적이 있는데, 이 모토 속의 ‘언더그라운드’란 바꿔 말하자면 ‘국가와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즉 국가의 논리 혹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은 ‘자신의 논리’ 혹은 ‘언더그라운드의 논리’로 돌아가는 장(field)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의 논리’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의 정확한 형태를 한정하는 것이 크게 의미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국가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너무 ‘하나의 길’을 강요하는 까닭에서가 아닌가? 특히 자본의 논리. "화폐를 재생산해라"란 논리는 음악의 논리와는 너무 그 간극이 깊다. 앞서 형태를 한정짓지 않겠다, 우리 사회의 모든 면면에서 작동되고 있는 이 자본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기본 가이드로서 우리가 제시하는 것은 ‘상생’과 ‘협동협력’,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들어내야할 것은 매스 미디어로 대표되는 ‘메인 스트림’의 외부,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근대적인 대중-매체를 경유한 음악활동이 아닌 다른 장(field)을 통한 음악활동이다.
이에 대해 구성원 중 한명인 음악가 한받은 지역, 생활, 민중의 가치를 지향해야한다 역설했다. 이러한 지향은 우리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할 수 있겠는데, 지향하는 가치들은 각각 메인스트림의 가치와 대립하고 있기도 하다. ‘광역’이 아닌 ‘지역’.‘심미’가 아닌 ‘생활’.‘대중’이 아닌 ‘민중’. 확실히 우리가 꿈꾸고 있는 것은 수동적인 ‘대중’들에게 규모있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음악 상품/콘텐츠’를 공급하는 현재의 유통구조를 넘어 그 자체로 주체적인 청취자인 ‘민중’과 직접 ‘지역’에서 만나 지역에서 노동하며 살고 있는 이들이 음악가들과 순환-공생하는, 말하자면 ‘노동-문화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장기적인 목표일 것이며, 단기적으로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자립공간구축 2) 소규모음반제작지원 시행 3) 자립공연기획 4) 자립포럼/세미나기획 5) 공정음원유통플랫폼 운영 6) 분기별 자립컴필레이션 제작 7) 상시적인 문화단체, 지역단체, 학술단체, 노동단체, 정당 등 연계활동 8) 지역 독립공간, 지역단체들과 적극적인 유니온(연대) 관계 구축 9) 팔도자립음악가네트워크 구축. 이에 대해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소규모음반제작지원 시행’ 정도만을 예로 들자면, 조합의 구성원들이 직접 구축한 자금 중 일부를 음반을 기획하고 있는 조합 구성원에게 마이크로 크레딧과 비슷한 형태로 대출하여 큰 돈이 없이도 음반을 제작할 수 있게 돕는 사업이다. 그래봤자 10~50만원 정도되는 어찌보면 큰 돈을 지원해주는 것은 아니나, 실은 음악가들 중 적잖은 수가 아르바이트나 계약직/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등 불안정노동으로 분류될만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탓에 몇십 만원 정도도 지출하기 버거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이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한 2011년 초부터 꾸준하게 지원을 받는 음악가들이 늘고 있으며, 국가나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들이 스스로 모은 공금에서 일부를 활용해 음반을 만들고 있는 까닭에 음악가 자신도 보다 책임있는 주체로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외의 사업에서도 우리는 1차적으론 음악가 자신이 1차적으론 음악의 생산은 물론 장소 구축, 유통, 홍보까지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플랫폼을 만드는 것을 도모하는 한편, 2차적으론 한받이 제안했듯 지역, 생활, 민중의 가치를 사업 속에 녹여내 결과적으로 국가/자본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로 운영되는 장(field)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인가? 서두에 나는 ‘(우리가 하는 음악이란 어쩌면) 쓸 데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라 썼다(물론 이 가정에 내가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곧바로 물었다. “(…) 쓸 데 없는 것들은 그럼 사라져야 하는가? 우리 음악가들의 삶은 없어져도 좋은 것인가?” 내가 이 지점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우리가 만드는 것들이 쓸 데 없건 말건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은, 그럼에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의 논리 속에 우리 ‘쓸 데 없는 것들(이를 ’잉여‘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이 ‘비빌 언덕’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있는 ‘주체’로서 만들어나가는 것, 그래서 국가와 자본의 논리 속에 ‘옳지 않았던’ 우리들을 새로운 논리 속에서 ‘옳은’ 이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가 얻을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주체다.”“우리는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다.”“우리는 살아갈 자격이 있다.”“우리는 모두 옳다.”
#. 3
나는 지금까지의 문제의식에 하나를 더하고 싶다. 일전에 한국 기본소득 네트워크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나는 <공공재로서의 음악을 향해>라는 제목의 글에서 비록 완성된 개념은 아니지만 음악가와 리스너, 그리고 나아가 음악가와 사회와의 소통을 위한 하나의 가설로서의 ‘음악권’이라는 개념을 제시해본 적이 있다. 이는 글의 바로 앞 단락에서 서술한 협동조합으로서의 고민을 넘어선,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고민들이다.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1)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자유롭게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자유롭게 음악을 공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3)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자유롭게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4) 모든 사회 구성원은 자유롭게 음악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단순한 서술들에 불과하지만 이에는 몇 가지 함의가 있는데, 1) 창작의 권리에 위해 :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음악을 창작하는 것을 돕기 위해 각 지역마다 싸고 간편하게 녹음이 가능한 스튜디오 등의 창작 인프라를 사회적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 2) 공연의 권리를 위해 : 지역마다 지역민이 쉽게 대관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연 시설을 사회적 차원에서 제공해야 한다. 3) 향유의 권리를 위해 :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공공화 시켜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출판(publishing)된 모든 음악에 대해 접근 가능하도록 하며 또한 거점 지역마다 음반, LP 아카이브 등을 설치하여 설치한다. 4) 이용의 권리를 위해 : 저작인격권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다만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서 영리목적으로 이용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인적인 복제, 공연, 방송, 전송을 허용한다.
2011년 1월 열린 달빛요정 추모공연 –밤섬해적단, [출처] <뉴타운컬쳐파티> 홈페이지(ntcp.kr)
아직 정리된 개념은 아니기에 이에 대해 세세하게 부연하는 것이 크게 의미있다 볼 순 없겠다. 이는 조합 내에서 합의된 바가 아니지만, 개인적으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노동-문화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만들어지기 위해 꼭 정립되어야 하는 사항들이다. 이는 분명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창작의 권리’와 ‘공연의 권리’와 동일하게 ‘향유의 권리’와 ‘이용의 권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요컨대, 이는 음악가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한 기획도, 청취자들의 ‘편’을 들어주기 위한 기획도 아니며, 그보다는 사회 전반으로 보았을 때 모두가 과연 어떻게 하면 더욱 자유롭게, 자율적으로 창작하고, 공연하고, 향유하고, 이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음악이 공공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 수록, 음악가의 삶과 생활 역시 공공적인 영역에서 많은 부분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프랑스의 앙떼르미땅 제도와 같은 형태로, 문화예술인에게 실업급여 조건을 완화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로 강하게 지지하는 것은 "어떠한 자산 심사와 노동 요구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 없는 소득"인 기본소득 제도이다(이에 대해선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기고한 필자의 글 <달빛요정ㆍ최고은…다시 비극을 반복할 텐가?>를 참조하길 바란다).
#. 4
한정된 분량에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다 보니 다소 두서가 없긴 하나, 난문 속에서 독자들이 대략의 흐름이라도 파악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앞서도 말했듯 두 번째 단락에선 협동조합으로서추구할 것들, 운동으로서 끌고 나가야할 것들에 대해 썼다면 세 번째 단락에선 제도적인 측면에서 해결해야될 것들에 대해 간략히 썼다. 아직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진 않았으나 꽤 덩어리가 큰 고민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최소한 음악계에선 이러한 고민들이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된 적이 드물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작년 여름과 가을 사이쯤, 우리 구성원들은 한 페스티벌에 음반과 여러 중고 서적들을 판매하기 위해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 페스티벌을 준비한 주체는 우리와는 다소 다른 형태로지만, 어찌되었건 10년 정도 협동조합의 방식으로 독립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공중캠프’라는 집단이었는데 마지막 공연이 끝나기 전, 무대에 오른 한 구성원이 “10년 동안 꿈꾸던 것을 드디어 이루었다”라 말하는 것을 듣고선 우리는 모두 여운이 긴 감동을 받았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부스를 정리하던 때, 우리 조합의 구성원 중 한명은 내게 문득 “우리도 10년 동안 열심히 해보자”라 말한 것이 기억에 유독 남는다. 아직까지 방만할 수도 있는 문제의식들, 우리는 이것들을 어떻게 정리해나가고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가? 우리는 지금 출발선에 섰다.
2011-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