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을 생산하다! 사회적 제작 <뉴타운컬쳐파티>
이상욱 (독립영화 <뉴타운컬쳐파티> 프로듀서)
죽음을 기억한다. 2011년 1월, 최고은. 그리고 6월, 스스로 목을 맨 노동 다큐멘터리스트 숲속 홍길동 이상현. 1월의 그녀는 쌀과 김치를 부탁하는 마지막 메모를, 6월의 그는 마지막 돈 2,300원으로 PC방에 왔다며 조금이라도 입금을 부탁한다는 글을 온라인에 마지막으로 남겼다. 고통은 그 죽음들의 사회적 맥락과 각자의 죄의식만이 아니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나 역시 한발만 삐끗하면 그들과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예감. 아마 당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알고 있으니까.
산업으로서의 영화
‘산업’의 지위를 획득한 상업 영화는 국가의 지원과 국민적 관심, 그리고 관객의 성원 속에 규모의 경제를 이룩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소유관계가 작동하는,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를 통해 소수 대기업의 지배가 가장 잘 보장된 상업영화계가 공공의 영역으로 치부되어온 것은 아이러니 하다. 그런 상업영화에 대한 지원은 궁극적으로 투자 재원의 일부를 국가가 부담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다.
이 공공의 지원과 투자를 자신들의 성장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으나 극단적인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로 진행된 상업 영화계 안에서 최고은은 죽었다. 어째서인가? 그것은 투자와 제작, 배급에 있어, 하다못해 학계와 언론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영화 산업의 발전”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구도 영화 산업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어떤 구조를 갖는 산업이며, 그 내부 구성원간의 관계와 분배가 어때야 하는지 질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화려한 빛 뒤의 어둠을 구조적으로 외면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 이후 ‘영화계 좌파 척결’을 위한 각종 잡음들은 일종의 넌센스에 가깝다. 영화계 좌우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한 합의에 있어서만큼은.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홈페이지 http://www.fkmwu.org/
영화 노조를 비롯한 몇몇의 노력이 있어왔다. 2007년 영화노조는 사용자 단체인 제작자협회와 단체협상을 체결했다. 100년의 역사를 갖는 한국 영화 최초의 단체협상. 그러나 곧이어 닥친 영화계의 불황, 명백히 과잉 투자가 원인인 불황 때문에 협약서는 종이조각이 됐다. 불행은 영화 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사용자인 제작자들 역시 불황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제작자들의 갑인 투자배급사에게 고용된 기획자 혹은 프로듀서로 살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지위와 계약을 감내하며 대박을 터트릴 그 날만을 꿈꾸며 버티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그를 탄생시킨 주역들에 의해 좌파로 규정되었던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비롯한 몇 안되는 한국 영화와 영상 산업에 대한 보호 장치를 폐기하기로 결정했을 때 여론은 영화계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민들은 한국 영화가 이제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당연하다. 국민경제의 관점에서 영화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는 평가와 더 많은 개방과 경쟁을 보장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논리의 공격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스크린쿼터가 보호하려 한 것은 어디까지나 산업으로서의 영화, 100만 500만 1000만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되는 영화, 수많은 스텝들의 저임금 무임금 노동을 작은 갑과 큰 갑이 합의한 영화, 해외 시장 개척을 통해 자동차 몇 대 만큼의 돈을 벌어들이느냐가 관건인 바로 ‘그 영화’였으니까. 여기에 문화다양성은 잘해야 철없는 소리 혹은 구질구질한 변명에 불과했을게다.
영화산업의 내적 구조와 속성, 분배를 문제 삼지 않는 국민경제의 수준에서 그리고 영화 외부와의 관계에서 그것은 숫자로 환원 가능한 균질한 무엇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 영화 산업은 규모와 수출액으로 평가되었을 테고, GDP 대비 기여도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 산업의 발전을 규모의 경제로 인지해온 영화인들에게 규모와 수출액에서 비교가 안되는 자동차 산업을 위해 영화산업의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는 본인들이야 억울해도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오늘에 이르러 극단적인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를 이룩한 대기업 영화 자본은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말 그대로 영화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돈 되는 모든 산업이 그렇듯. 그러니까 현 단계 한국 영화의 가장 큰 문제라는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는 영화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최소한 영화계의 힘있는 주류들의 암묵적 합의가 만들어낸 작품이기도 한 셈이다.
독립영화
수많은 독립영화인들이 시스템 밖에서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들은 때로 날품을 팔았고, 때로는 동료와 친지의 돈과 노동을 품앗이 했고, 또 때로는 그들만큼이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과 기회와 노동을 교환했다. 그렇게 만든 영화는 몇 개 안되는 영화제와 그나마 사라져버린 한 두 개의 공중파 프로그램과 차츰 동력을 잃어가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 대중들 앞에 선보였다. 물론 운 좋은 소수는 상업적 배급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았고, 성공했으며 그래서 찬양 받았다.
이런 독립영화인들에게 국가지원은 가뭄의 단비였다. 국가 기관을 통한 제작비 지원과 안정적인 상영 공간의 확보는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지원은 축소되고, 직접 지원은 간접 지원이라는 형태로 독립 영화인들로서는 체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가 희극지왕 조희문 전 위원장의 좌충우돌 덕에 간신히 몇 가지를 살려내는 수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파행을 겪었던 독립영화 전용관은 직영 형태로 어쨌든 살아남았다. 한편으로 독립영화인들과 영상활동가들의 오랜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광화문 미디액트를 비롯한 전국의 미디어센터들은 정부기관과 지자체에 의해 독립성을 훼손 받고 있으며, 자립의 길을 택한 미디액트는 여전히 악전고투 중이다.
결국은 국가가 문제였다.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이 국가, 그러니까 대기업, 재벌들에게는 앓는 소리조차 골라서 하지만 그 외 모든 사회구성원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가 독립영화의 지원을 좌지우지 하는 한 정권 교체는 곧 독립영화 지원제도의 개편을 의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더 독립영화 친화적인 정권을 창출하는 것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 가지 함정이 있다. 첫째는 정권을 내 입맛대로 고를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과 둘째, 좋았던 시절의 국가 지원 역시 그저 단비에 불과했을 뿐, 독립영화 제작 배급의 근본적인 환경을 개선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시절 시장논리는 더 강력해졌다는 것. 셋째, 상업 영화계가 그랬듯이 도대체 독립영화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빠져 있다는 것.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결국 영화는 만든 이와 보는 이 사이의 대화다. 상업 영화가 자본주의적인 상업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면, 독립영화의 대화는 어떤 논리로 작동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취향은 그러니까 주류의 그것 이외에는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는 상업적 영상 산업이 실제로는 대중의 취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한, 대중의 취향이 가변적인 자기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따라서 독립영화에 대한 관객의 무관심은 상업 영화계, 그것도 극단적인 독과점과 수직계열화한 영화산업이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별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서서 영화의 장르와 문법, 언어와 스타일은 사회 문화적 수준에서 형성되는 것이니 산업의 구조가 여기에 끼친 영향력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독립영화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할 것인가? 또 독립영화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업 영화의 축소판, 그러니까 좀 작고, 가난하고, 그런데 좀 더 시끄러운 무엇일까? 아니면, 독립영화는 상업 영화와는 다른 지평을 갖는 무엇일까?
답하기 어려운 이 질문들을 이런 우회로를 거쳐보자. 90년대 이후 영화 관객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사람들은 더 많은 영화를, 더 자주 보아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장세는 둔화되어왔다. 산업으로서든, 문화 혹은 예술로서든 관객은 영화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체된 관객 수를 증가시킬 수 있을까?
몇가지 간단한 해법이 있다. OECD 최강이라는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된다. 사회적 수준에서 임금을 올리면 된다. 대학등록금을 줄이고 스펙 쌓기를 중단시켜 대학생들에게 영화관에 갈 여유를 주면 된다. 관객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적이고 경제적인, 정서적인 여유를 더 많이 가질수록 영화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영화만이 아니다. 이른바 문화생활 전반이 더 확장될 것이고, 더 많고 다양한 경험과 취향을 찾게 될 가능성 역시 더 높아진다.
애초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독립영화 제작 배급의 환경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나?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영화 산업을 넘어 문화 산업 일반의 독과점을 해체하면서다. 상업 논리로만 무장된 산업이 문화생활을 지배하는 것을 제어함으로서다. 문화예술이라는 것이 국민경제의 논리에 입각한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독과점과 수직계열화에 통해 규모를 이룬 반면 편벽해진 ‘산업’의 논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서다. 최소한 만들고 향유하는 생산과 소비, 혹은 창작과 수용의 관계가 ‘산업’의 밖에도 형성됨으로서다. 혹은, 산업 그 자체의 구조가 다양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을 때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또 하나의 우회로가 있다. 영화 산업의 발전이란 무엇인가? 영화 산업의 발전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적어도 이런 항목들‘도’ 존재해야할 것이다. 산업 내 종사자들에게 적절한 분배가 이뤄지는가? 산업 내 각 영역에 최소한 자본주의적인 수준의 공정성은 지켜지고 있는가? 산업이 국민들, 최소한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양적, 질적 수준은 적절한가? 또 있다. 해당 산업은 여타 관련 산업과 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해당 산업은 해당 사회에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차라리 국가의 역할은 이쯤에 있었을 것이다. 문화 예술에 돈을 매겨 더 많이 벌어오는 영역에 세금을 쏟아 붓는 것 말고, 시대를 역행하는 이념과 정치적인 통제 말고, 국민들이 더 많은 문화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더 다양한 취향과 향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문화 산업 내부의 구조와 분배, 그것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경로를 풍부하게 하는 것. 그러나 우리의 국가는 다른 길을 걷고 있고, 물론 우리는 거기에 합의했다.
사회적 제작, <뉴타운컬쳐파티>
이 글의 애초 주제는 <뉴타운컬쳐파티>라는 작품의 독특한 제작 방식, 즉 사회적 제작을 소개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안 문화예술 생산이라는 문제의식에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의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길고 긴 서론을 거쳐야만 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익숙한 몇 가지 관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간략한 본론에 들어가 보자.
프로젝트 <뉴타운컬쳐파티>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영화를 만든다. 만드는 영화는 1년 뒤 공개라이선스로 전환되어 사회에 환원된다. 수익금은 독립영화제작지원금을 비롯한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되며, 참여한 영화 노동자, 예술인들에게 최대한 정당한 몫을 주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의 주체에 의해 “사회적 제작”으로 명명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어떤 의의를 갖는가? 그것은 상업의 논리, 산업의 논리, 그나마도 대단히 제한되고 편향된 논리로 구성된 영화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이다. 영화를 만들고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영화를 만드는 구성원들 간의 분배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영화로 통해 파생되는 가치는 영화 밖과 어떻게 재분배되어야 하는가? 영화를 만드는 이와 보는 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가? <뉴타운컬쳐파티>의 사회적 제작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을 찾는 과정이다.
동시에 <뉴타운컬쳐파티>의 사회적 제작은 앞서 제기된 독립영화의 과제에 대한 실험이며 도전이기도 하다. 독립영화 제작 배급 환경의 근본적 개선. 독립영화인 개개인을 제외하면 국가 지원에만 국한된 독립영화 제작비를 시민사회 혹은 관객들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참여를 통해 조달해 보는 것. 1만원 혹은 클릭 1번으로 영화 만들기에 참가한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 제작자가 되어 함께 만들고, 홍보하고, 배급하고, 함께 보는 것. 수익의 공공적 사용, 나아가 독립 영화 스스로의 힘으로 지속 가능한 독립영화의 구조를 모색하는 것. 그럼으로써 상업적 시스템으로부터 배제된 독립영화 배급의 또 다른 활로,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또한, 독립영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편향된 산업의 논리에서 벗어나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 영화 만들기를 독립영화 제작자 개인의 몫에서 좀 더 대중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는 것. 영화 보기에도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소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럼으로써 독립영화에 사회적 맥락을 추가하는 것.
2011년 4월 16일 <뉴타운컬쳐파티> 제작발표회 [출처] <뉴타운컬쳐파티> 홈페이지(ntcp.kr)
<뉴타운컬쳐파티>의 이런 실험은 사회적 제작 2호인 <강,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시도로서의 <뉴타운컬쳐파티>가 사회적 제작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차원과 의미를 확장하고 모색하는 것에 집중한다면, <강,정>은 급박한 사회적 문제에 독립영화가 참여하는 방법에 방점을 찍는다. 제주 강정 마을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다수의 창작자가 사회적 제작의 모델을 통해 제작하고, 만들어진 영화를 마찬가지로 사회환원하고 수익금을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강,정>은 그렇게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독립영화 제작 배급과, 향유의 또 다른 길을 사회적 제작을 통해 찾고자 한다.
따라서 <뉴타운컬쳐파티>의 사회적 제작이 갖는 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한 작품에 그치지 않고, 독립영화계 전체에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로 이어진다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을 지향한다는 것, 나아가 이런 시도와 성과, 시스템화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대기업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영화 정책과 산업에 또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타진하는데 있다.
마지막으로 <뉴타운컬쳐파티>의 사회적 제작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그것이 “사회적 산물의 속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신문기자가 자료를 참조하고, 인터뷰를 해서 만들어진 기사의 지적 소유권은 누구의 것일까? 그 신문기자가 읽고, 쓰는 동안 밥하고, 길 닦고, 청소하고, 인쇄하는 사람들의 기여는 어디에서 실현되는가? 인터넷과 SNS를 통해 실현되는 자발적 개인들의 창조적 에너지와 노동의 성과는 누구에 의해 소유되고, 분배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산물이 생산되는데 있어 갖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은 어디에서 실현되어야 하는가? <뉴타운컬쳐파티>의 사회적 제작은 영화라는 산물이 만들어지고, 배급되고, 향유되는 과정에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이 사회적 차원의 기여를 인정할 필요가 있지는 않은지, 그것을 사회 환원이라는 방식으로 실현하는 것은 어떤지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최고은의 죽음 이후 예술인 복지법이 화두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예술인 복지법의 시행에는 두 가지 선결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의 창작 행위를 노동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 그리고 유사한 처지에 있는, 이를테면 특수고용 노동자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 즉, 영화를 떠나 범사회적으로 노동을 노동으로 인식하고, 노동에 대한 정당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한 예술인 복지법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불균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문제는 또 있다. 영화 산업의 구조와 성격, 내부 분배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예술인 복지법은 그저 땜질 처방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도 여전히 남는 것이 있다. 숲속 홍길동 이상현의 죽음이 그렇다. 그가 만든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을 담은 수백 개의 영상들은 어째서 그에게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의 행위는, 노동은, 창작은 그에게 삶을 지탱할 힘으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우리는 여기에 답을 내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알 수 없다. 아니, 우리는 오랫동안 이런 현실을 쉽사리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성장에 매몰되어 왔다. 노동자 혹은 서민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상류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가혹한 경쟁을 승인해왔다. 그러나 최근 복지가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계급 계층 이동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너무도 희박하며, 너무 많은 자원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 그러니까 성장도 좋지만 이제는 분배도 필요하다는 자각이 우리 사회에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영화계 역시 필요한 것은 영화인 그리고 영화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것일테다. 그 첫 단추는 실은 같은 처지에 있는 각자의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일테다. 그러니까 수백의 영상을 남기고 삶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다.
독립영화의 사회적 제작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러니까 독립영화를 만들고, 배급하고, 수용하는 것이 실은 각자의 문제가 아니며, 독립영화가 갖는 사회적 차원과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보자는 제안에 있다. 독립을 위한 자립. 자립을 통한 독립. 그것은 독립영화가 애초가 갖고 있고, 가져야할 사회적 의미를 실현하는 것을 통해 구현될 것이다.
2011-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