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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에 열린 ‘정보사회 세계정상회의(이하 WSIS) 3차 준비회의’는 정보사회의 비전과 국제적 협력사안을 놓고, 각국 정부간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됐던 국제외교의 새로운 마당이었다.
WSIS에 무관심했던 미국마저도, 여러 국가들을 블록화 하면서 개발도상국 중심의 흐름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또한 WTO(세계무역기구) 칸쿤 회의에서 형성된 중국, 브라질, 인도, 중동국가, 일부 아프리카 국가 등 G-22로 결집된 국가군 또한, 현안 문제들에 촌보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긴장과 대립구도를 형성함으로써, 정상회담을 바로 앞에 둔 WSIS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 제로의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주제관련 본회의(Contents and Themes Plenary)는 준비회의의 중심으로, 원칙선언문 초안과 행동계획안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각국 정부들의 의견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여러 국가군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이슈의 경우에는 일종의 힘겨루기 방식으로 의견대립이 표출됐다. 유럽연합(이하 EU)은 이탈리아 정부대표를 통해 그들의 입장을 피력했고, 중동국가들 중에서는 시리아가 의사를 표현했다. 중국은 G-22 국가들을 주도적으로 블록화 하면서 회의의 한 흐름을 이끌어 갔다. 타이와 말레이시아는 사안에 따라 국가들의 블록을 넘나들면서 독특한 자기 위상을 만들었다. 스위스나 노르웨이 등 일부 북유럽국가들과 캐나다는 미국과 EU의 입장 사이에서 중재적인 타협안을 내놓으면서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보통신이란 말만 나오면 세계가 인정하는 정보통신선진국임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대한민국 정통부는, 도대체 WSIS회의에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대표단이 규모면에서 작은 것도 아니었다. 연인원 6명, 매주 5명의 대표단이 참석했고 제네바 대사관과 ITU(국제전기통신연합)에 파견나와 있는 정통부 관계자 1명을 합한다면 총 7명 규모의 대표단이었다. 규모면에서는 확실히 정보통신 선진국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대표단의 목소리는 회의장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본회의장에서의 발언은 물론, 워킹그룹회의에서조차 한국대표단은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심지어 필자에게 현안문제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이 뭐냐고 묻는 다른 나라 대표단까지 있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이미 입장들이 뚜렷하게 갈려서 대립하는 마당에 대표단이 발언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선진국과 개도국 틈바구니에서 입장을 정하기가 난감하다”, “이미 WSIS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등. 한국대표단의 침묵을 변명하는 온갖 설명도 필자 눈에는 전혀 아무런 설득력도 없어 보였다.
대표단이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대립이 뚜렷할 때 발언에 필요한 영어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관련 현안 문제에 대해서 본국의 관련 부처가 아무런 입장을 전달해 오지 않는다”는 항변은 국제무대에서 드러난 부처이기주의와 관료주의의 폐해일 뿐이었다. “그래도 대통령이 정상회의에 참석하면 잘한다. 이번에는 장관급이라 아무래도 소홀해지는 면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은 국제회의에 임하는 우리나라 전시행정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말해 줄 뿐이었다.
2004년 WSIS 3차 준비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은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회의현장에서 ‘정보통신 선진국, 대한민국’은 완전한 허깨비였다.
또한 진보넷 네트워커 편집위원으로 활동중입니다.
2003-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