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9.03.23(토) – 2019.07.28(일)
전시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30, 3-4전시실
관람시간 : 월. 화. 수. 목. 일: 오전 10시-오후 6시 / 금. 토 : 오전 10시-오후9시
전시 소개 :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의 삶은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 빅데이터, 블록체인, 인공지능 등의 첨단기술과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종류의 디지털 정보이자 신기술을 구성하는 기본단위인 데이터를 가공하는 방식 또한 눈에 띄게 다양해지고 있다. 우리의 사회는 개인의 일상부터 국가단위의 시스템까지 점차 데이터화 되고 있으며, 사회 경제적 패러다임 또한 데이터의 진화를 기반으로 바뀌고 있다.
데이터를 가공, 소유, 유통하는 주체는 누구이며, 어떠한 방식으로 그들이 가진 정보를 권력화 하는 것인가. 데이터를 둘러싼 맹목적인 믿음, 또는 그 근거 없는 불신과 위기감은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공공의 선에 기여하도록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이번 전시는 이러한 질문들을 바탕으로 디지털 기술을 탐구하고 미적 특징을 발견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어서…)
희우 : “어릴 적 집에 혼자 있는 날 괜스레 뒷목이 서늘함을 느끼며 누군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았던 적이, 누가 이 공간에 나와 같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있으니 나와! 이런 대사를 외치며. 그런데 이제 정말로 나는 혼자 있는가? 이건 정말로 나만 아는 일인가? 모든 것이 모호해졌다.”
덩야 : 나는 불온함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시대정신을 담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한때 유행해 이제는 낡은 단어가 된 탓도 있지만, 불온한 시선은 권력을 정확히 드러내지도, 날카롭게 해체하지도, 그러므로 위협적이지도 않다. 권력에 빙의해서 보자면 불온함에 대한 반응은 어쭈, 까부네 정도의 감상이 될 것 같다.
우연 : 전시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보이는 자크 블라스(Zach Blas)의 ‘얼굴무기화수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자크 블라스는 빅데이터 시대의 안면 인식 기술이 권력과 자본의 무기가 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탐지될 수 없는 무정형의 가면을 제작함으로써 안면인식 기술이 보여주는 불평등에 맞서 저항하기를 시도한다. 블라스는 미국 어느 작은 도시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의 얼굴 데이터를 수집해 집단가면을 제작했다. 그는 이 가면들을 통해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 페미니즘, 국가주의 등에 대해 논하고, 얼굴을 무기화할 수 있는 사회운동의 전략을 탐색한다.
민 : 얼굴무기화세트는 얼굴 정보를 베이스로 하여 조합해 만든 익명 마스크를 제시하며 유형학적 분류와 감시에 저항하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작업이었고. 기계와 코드가 인간의 얼굴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과정, 편견이 개입된 유형학적인 태도로 현실의 차별을 인계받아 그것을 공고히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희우 : 홈IoT, 메신저, 메일함 등 나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애를 쓰는 것도 조만간 무용지물이 될 기세다. 공기만을 마시며 칩거하지 않는 한 ‘나’라는 것을 이루는 모든 것들-외모부터 유전자까지-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집돼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나를 특정하는 수단이 될 거라는 공포감이 든다.
민 : 감시에 저항하는 온라인 상의 시민들은 항상 존재해왔다. 페이스북의 얼굴인식과 관련해 무작위 인물의 얼굴을 태그하여 데이터에 혼동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감시카메라에 대항하는 메이크업이나 인식에 혼동을 주는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시도도 꾸준히 있었다. 허나 이는 빠르게 발전하고 진화하는 기술에 의해 실질적인 저항의 효과는 가져올 수 없었고 이것과 마찬가지로 얼굴무기화세트도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갤러리에 전시되는 작업과 기술을 매개로 한 온라인 상의 저항적 행동과는 그 성질이 다르지만. 그 성질이 다르기에 또 다른, 더 큰 담론을 다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희우 : 이 공포감은 내가 조만간 범법행위를 저지를 예정이어서 특별히 드는 감정이 아니다. 푸코는 사회 어디에서든 감시당하는 인간은 규율과 훈육으로 길들여져 순종적 신체에 머무르고 만다고 지적했다. 감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 구성원이 자기 검열을 만들어내 무한한 규율 안에서 살게끔 한다.
덩야 : 어떻게 생각하든 전시된 작품들은 특별히 불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대체로 수량화되고 데이터화되는 디지털 환경이 사회규범으로 자리잡으며 대량감시가 일상화되기 쉬워진 데 대한 예술가의 불안감을 느꼈을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 줄 변화에 순응하는 낙관적 전망이 엿보이는 작품도 더러 있었다.
민 : 레프트 갤러리 설명자는 블록체인과 그것의 토큰 이코노미가 뒷받침하여 구성되는 새로운 예술작품의 소유와 판매 시스템에 대한 작업이다. 기존에 존재하는 상업 시스템을 블록체인으로 혁신하자는 것은 이미 수많은 기업들과 스타트업과 정부의 설레발로 인해 진부한 주장처럼 들리곤 한다. 레프트 갤러리도 기술적으로 이와 큰 차이는 없다. 또한 P2P정신이 소멸하고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블록체인의 아쉬운 점을 그대로 안고 간다.
민 : 블록체인과 토큰 이코노미를 적용한 작품의 생산과 거래와 보증 시스템보다 흥미로웠던 건 데이터이자 파일, 또는 이 토큰 (혹은 토큰에 비례하는 작품)의 메타데이터에,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인 DNA, 유전자 구조를 새기는 것에 대한 상상이었다. 현실적으로는 파일로만 존재하는 가상의 미술작품이 특정한 DNA코드를 갖고 있어 이를 계승하고 차용한 또 다른 예술작품에도 그 특정한 DNA코드가 남게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물리적인 매개라고는 하드드라이브 뿐인 디지털 예술작품 파일이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작가의 낙관적인 입장과는 반대로, 이러한 시도가 실험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우스운 점은, 블록체인과 암호자산을 응용한 온갖 거품 가득한 현실의 사업-프로젝트에 비해 레프트 갤러리 설명자에서 말하는 블록체인 활용 그리고 현재 운영 중인레프트 갤러리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효용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덩야 : ’불온한’ 전시의 취지와는 다르게 봤지만 흥미로운 작품이 하나 있었다. ‘현대’ 이스라엘이 차지한 팔레스타인의 나깝(네게브) 사막의 베두인 마을에서 작업한 팀의 ‘작품’이었다. 나깝 사막은 71년 전, 이스라엘이 차지한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의 78% 중 하나다. 추방, 학살, 마을 파괴 등 건국 후에도 지속된 이스라엘의 인종청소 정책에도 불구하고 베두인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전히 현대 이스라엘 인구의 17%를 점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시민권자지만, 50여개의 법안을 통해 공식적으로 ‘2등 시민’으로 취급 받는다. 이스라엘 정부는 나머지 22%의 팔레스타인 땅, 즉 현재 반 세기 넘게 군사점령하고 있는 서안지구·가자지구·동예루살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들 이스라엘 시민권자들이 사는 마을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승인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파괴하고 있다. 어떤 마을들은 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되기도 훨씬 전부터 지속되어 왔는데도 말이다.
민 : 포렌식 아키텍처는 공공 데이터와 직접 개입하여 생산해낸 데이터를 통해 사람의 실존을 증명한다. 얼핏 자유로워보이고 객관적일 것만 같은 데이터는 힘의 관계에 따라 그 모습과 태도가 달라진다. 구글어스가 전세계를 찍었지만 정치적인 관계에 의해 특정 지역은 높은 화질을 지원하지 않는 것처럼, 무고한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법과 그 집행자는 오로지 그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증거만을 내보이는 것처럼. 포렌식 아키텍쳐는 어떠한 권력의 입김도 들어가지 않은 데이터를, 커뮤니티 위성이나 당사자와의 협력을 통해 직접 생산해내고, 이를 기반으로 삶과 투쟁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재구현하며 사람들을 지원하고 현실에 개입한다.
우연 : ‘포렌식 아키텍처의 ‘지상검증자료’는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네게브 사막에서 벌어진 어느 사건을 다룬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곳에 사는 베두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왔다. 포렌식 아키텍처는 일종의 ‘위성’을 만들어 항공사진과 위성사진를 종합했고, 주민들의 증언을 수집했다. 이는 그를 통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된 환경, 그곳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존, 수탈, 폭력을 드러낸다.
덩야 : 2017년 움 알 히란 마을 철거와 주민 살해는, 이스라엘이 자국의 ‘2등 시민’에게 어떻게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이었다. 베두인의 강제 이주를 전담하는 경찰 특수부대는 불법 철거 중에 주민을 한 명 죽이고는, 그 사람이 테러리스트고, 자동차로 경찰을 살해하려 든 데 대한 정당방위로 그를 죽였다고 거짓 발표했다. 많은 목격자와 영상 촬영본까지 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포렌식 아키텍쳐’ 팀은 현장의 정보를 가져와 시뮬레이션을 통한 사건의 재구성으로 경찰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했다.
우연 : ‘움 알-히란에서의 살인’도 이와 비슷한데,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움 알-히란 베두인 마을을 공격했던 사건을 다룬다. 이는 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테러 때문이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포렌식 아키텍처는 그것이 거짓말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실은 이스라엘 정부의 무자비한 공격에 불과했을 뿐임을 증명한다. 시민사회와 예술가 집단이 협력해 다양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그를 통해 권력에 맞선 사회운동의 전략을 다룬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덩야 : 움 알 히란을 비롯한 베두인 마을의 역사를 증거하는 위성 지도를, 오직 식별이 불가능한 저해상도로만 볼 수 있도록 접근권을 제한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땅의 역사를 조작해온 이스라엘의 일관된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누구나 알지만 제어하지 못했던 그 노골적인 조작은 ‘과학적’ 데이터로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우연 : 자크 블라스와 포렌식 아키텍처의 작업 모두 빅데이터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에 맞선 사회운동의 실천적 전략을 실험한 셈인데, 현대미술의 예시적 실천의 한 사례로 충분히 기억해둘만 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퍼포먼스들이 ‘현대미술’이라는 장 안에서 관람객들에게 전달될 때, 그것이 미술관이라는 장치, 화이트박스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고 이와 같은 실험들이 상시적인 운동의 장에서 결합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다 긴밀하게 정치와 예술의 협업과 동맹이 필요하지 않을까?
덩야 : 사실관계를 날조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이스라엘 당국의 불법 행위에 온 삶으로 저항하는 이들의 활동을 묘사하기에 불온함이란 수식어는 부족하다. 여담으로 이스라엘 당국은 움 알 히란을 부수고 지워버린 위에, 여전히 ‘히란’이란 이름을 가진 정통 유대인 마을을 짓겠다고 한다.
희우 : 부당한 노동환경과 차별적 대우가 없었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의 입을 막고 그저 공정에 투입시킬 생각만 하던 시스템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모두가 다 말할 수 없게끔 감시하고 억압했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게끔 내면에 감시를 체화했다. 감시에 대한 공포는 내가 더이상 불특정 다수 중 하나로 행동할 수 없다는 공포이며 개인이 저항할 수 없고 주체적으로 살 수 없는 사회에 대한 공포다.
덩야 : 우리는 스스로를 ‘불온’하다고 표현하진 않는다. 오직 불온하다고 평가받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평가는 권력 관계를 전제한다. ‘불온하다’는 권력의 우위를 점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전시 제목을 ‘불온한 데이터’라고 붙인 것은 어떤 효과를 의도한 것일까? 국가나 자본이라는 거대 권력의 시선을 전유(專有)하겠다는 것일까. 그럼으로써 저항 의지를 드러낸 것일까.
편집자주 : <함께 보는 정보인권>진보네트워크센터의 구성원들이 정보인권 관련 미디어 및 문화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때로는 평범한 작품도 정보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