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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우리는 인터넷에서 자유를 발견했다{/}‘정보인권’의 발명(1)

By 2016/09/30 10월 13th, 2017 No Comments

[연재] 우리는 인터넷에서 자유를 발견했다

편집자주 : 한때 인터넷에서는 무한하게 자유로울 것이라 기대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저절로 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이용자를 비롯한 시민들은 국가, 기업 등 권력자를 상대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합니다. 디지털 환경이 고도화할수록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을 누리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터넷 도입 전후로부터 시작된 디지털 검열과 감시의 역사, 그리고 시민의 저항 속에 변화해온 제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하였습니다. 제보와 잘못된 정보는 이메일 della 골뱅이 jinbo.net 로 알려 주십시오.

‘정보인권’의 발명

한국사회에서 정보인권에 대한 요구는 시민사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정부 주도의 정보화 확산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이나 참여는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 내무부가 전자주민증 계획을 밝혔을 때 많은 시민들과 인권사회단체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62년 주민등록법이 제정되고 1968년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기 시작한 이래로 별다른 사회적 문제제기 없이 시행되어 온 이 제도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반대 여론이 높아진 것은 정보화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시민사회는 전자주민카드로 인한 개인정보 유출이나 국가감시의 가능성을 들어 이 제도를 반대하였다. 1998년 첫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야당 후보자 시절부터 전자주민카드를 반대해온 김대중 정부는 전자주민카드 시행계획을 백지화하였다.

84_우리는-인터넷에서-자유를-발견했다_022000년에는 인터넷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었다. 당시 정보통신부는 정보통신윤리 확립을 위해 사업자와 이용자의 의무를 강화하는 내용의 ‘통신질서확립법’을 추진하였다(현행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기능을 크게 강화하고 인터넷사업자로부터 ‘불량’ 이용자의 성명, 주민등록번호 등을 제공받아 ‘불량이용자 DB’를 관리하겠다는 등의 계획이 담겼다. 2000년대 전후로 활발해진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 활동으로 자유로운 인터넷을 만끽하던 이용자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시민사회는 특히 ‘인터넷 등급제’의 문제점에 주목하였다. 인터넷 등급제는 영리 목적으로 청소년에게 유해한 인터넷 컨텐츠를 제 공하는 경우 내용등급제를 의무적으로 도 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 떤 등급을 부여할 것인지 행정기관인 정보 통신윤리위원회가 일방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었다.

가상연좌시위를 앞두고 정보통신부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소동이 일기도 하였다(이 사건으로 진보네트워크센터는 경찰로부터 7시간 동안 압수수색을 당했으나 후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도입되는 인터넷 등급제에 대하여 청소년 이용자들이 크게 반발했다. 십대들이 주요 창작자로 참여하는 팬픽이 검열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인기 아이돌 팬클럽들에서 반대 여론이 높았고 당시 정보 통신부 게시판은 “팬클럽이 단결하여 질서 확립법 끝장내자”, “청소년이라고 해서 모 든 것을 어른들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까” 라는 내용의 게시물들로 뒤덮였다. 성소수자들 또한 인터넷 등급제에 반대하며 정보 통신윤리위원회의 폐지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인터넷 등급제의 대상이 될 ‘청소년유해매체물’의 법정 기준에 ‘동성애’를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용자와 시민사회의 반발이 확산되자 법안 은 의무적 등급제를 자율등급제로 수정하는 등 여러 차례 수정되었고 이듬해 1월 국 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인터넷의 내용 규제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 이 커져 가는 가운데 2002년 헌법재판소 는 ‘불온통신의 단속’ 조항에 대한 진보네트워크센터 등의 공익소송사건에서 “인터넷은 공중파방송과 달리 ‘가장 참여적인 시장’, ‘표현촉진적인 매체’”라고 선언하며 인터넷 표현의 자유에 손을 들어 주었다.

84_우리는-인터넷에서-자유를-발견했다_03‘정보인권’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하고 제도화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 계기는 2003년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둘러싼 논쟁이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은 시·도교육청 및 교육인적자원부에 시스템을 구축하고 모든 교육행정기관 및 초·중등학교를 인터넷으로 연결하여 교육행정 전반 업무를 연계처리하는 시스템이다. NEIS 도입에 대해서 교사·학부모·학생 등 정보주체가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정보주체의 동의나 법적 근거 없이 중앙정부가 전자적으로 정보를 수집 및 처리하는 것이 ‘정보인권’ 침해라는 것이었다. NEIS를 둘러싼 논란이 커져가면서 ‘정보인권’에 대한 논쟁이 사회적으로 크게 일었다.

개인정보에 대한 정보주체들의 요구가 커져가면서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 또한 제도적으로 인정되어 갔다. 2003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가 NEIS에 대하여 인권침해 결정을 내렸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의 일부라고 보았다.

2005년 헌법재판소는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이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독자적인 기본권이라고 인정하였다.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빈번해지고 개인정보의 디지털 처리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되면서 2011년 비로소 <개인정보 보호법>이 제정되었다.

인터넷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또한 헌법재판소가 인터넷 본인확인제(실명제) 위헌 결정으로 익명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고, 허위의 통신에 대하여 위헌으로 결정하였으며, 트위터 선거운동을 인정하는 등 제도적으로 확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