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2호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jinbo.net/~jbreview/%c0%e2%c1%f6/jb9912.html
<정세>
문화시대와 국가권력의 이동
– ‘국가보안법’에서 ‘청소년보호법’으로
고길섶(문화연구가/서울문화이론연구소 연구위원)
1. 문제설정: 국가권력장치의 중층화
국가권력이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 1997년 7월부터 제정, 시행해오고 있는 ‘청소년보호법'(이하 청보법)과 그 수행기구 ‘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가 바로 그것. 그렇다면 국가권력을 뒤흔들고자 하는 좌파 혹은 진보진영은 그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해오고 있는가? 제정 당시 진보적인 문화계에서는 검찰의 만화작가 소환 등 일련의 ‘표현의 자유’ 탄압과 관련하여 ‘신자유주의 및 신보수주의’의 새로운 준동으로 인식하기는 하였으나(주1) 청보법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없다. 그러나 그 법의 기능, 성격, 효과로 볼 때 새로운 지배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청보법은 문자 그대로라면 청소년들을 소위 ‘유해환경들’로부터 보호한다는 사회윤리적 명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상을 넘어 실질적으로는 국가권력 행사의 새로운 장소가 되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국가권력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문제제기하고자 하며, 나아가 좌파/진보진영이 실천적 스펙트럼을 다층화하려 한다면 청보법과 같은 새로운 장치들을 통해 수행하는 권력생산의 헤게모니 강화 전략을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가 더 보태지고 있다는 차원의 인식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권력지형의 변주를 읽어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청보법을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과 연동해서 사고하고자 한다. 국보법은 주지하다시피 1948년 12월 제정, 시행된 이래 국가권력과 지배체제의 수호 및 재생산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현실의 변화와 대중들의 탈정치화에 따라 그 적용대상이 현저히 감소되고 그 효력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쇠잔해가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주2) 최근에는 여야의 정권교체에 힘입어 지배권력 스스로도 개폐논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 개폐 또는 대체되더라도 그 핵심은 보존되리라고 본다. 근대정치의 포악한 악마인 국보법류의 ‘역사적 임무’는 지배체제가 존속되는 한 포기될 수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미 근대정치의 낡은 유물들에서 탈주하여 문화적 스타일을 중시하는 삶의 방향으로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게다가 대중들의 이러한 흐름이, 가령 젊은 문화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낡은 지배체제로부터 탈영토화하는 문화욕망의 변주들을 증대시키고 있어, 지배권력은 그 변주들을 재영토화하는 새로운 공리계의 필요성을 인지하였을 터이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나는 청보법이라고 생각한다. 국보법으로서는 그 변주들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한다. 요컨대 국보법이 청보법으로 ‘대체’됨으로써 국가권력행사의 공리계가 정치구성체에서 문화구성체의 영역으로 새롭게 ―그러나 무척이나 낡은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보법이 국보법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국보법을 폐기하고 그 기능을 청보법으로 대체입법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체’의 의미는 국가권력이 생성되고 행사되는 장소들의 위상학적 이동이자 새로운 계열화, 그리고 그것의 중층적 재배치라는 맥락에서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정세적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특이점이 차이나게 형성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역사성과 관련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은 동어반복이 아니라 이어반복적으로 체제재생산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바, 그것은 지배집단이 구사하는 ‘변이의 정치학'(주3)으로 요약될 것이다. 대중들의 정치적 욕망이 집중되는 근대정치에 있어서 억압체제는 국보법이 그 역사적 임무를 다해왔으나 이제 현실이 바뀌어 대중들의 문화적 욕망이 중시되는 탈근대적 문화조건들에 있어서의 억압체제는 청보법에 그 역사적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주4) 그리고 그 역사적 임무는 국보법에 의한 권력행사를 포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위에 중층화시킴으로써 대중들의 자유로운 삶에의 욕망을 새로운 역사적 고리들로 압박한다. 앞으로는 국보법보다는 청보법이 지배체제의 수호논리에 더 잘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탈정치화 경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중들은 이제 정치구성체가 아니라 문화구성체를 욕망하는 문화시대에 들어와 있고, 따라서 문화 스타일의 탈주선들이 지배체제를 더 위협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2. 국가보안법의 ‘역사적 임무’
국보법은 정치와 개인의 존재론적 구성을 일종의 ‘부정의 정체성’으로 초코드화(반공이데올로기의 위로부터의 공급)해왔다.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함으로써 비로소 개인은 ‘국민적 개인'(주5)이자 정치적-사회적 존재로서 등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은 주민등록증의 소지로서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빨갱이 콤플렉스’로 요약되는 바, 자기검열적 정신분열의 과정에서 수행되는 고통의 시공간 압축이 무의식화된 채 발화주체로서나 행위주체로서 사회적 장에서 빨갱이가 아님을 끊임없이 검증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사상의 자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소위 ‘사상검증’론이 공공연하게 일종의 사회적 진리로 통용될 수 있는 것도 부정의 정체성으로 초코드화해 온 국보법/반공이데올로기의 우익체제화 논리 때문이다. 국보법은 하나의 법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일괴암적으로 결정짓고 명령하는 사회체제 이론이다. 그리고 그것의 목표는 체제를 거스르는 빨갱이들을 사냥하는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 지배체제의 영속화에 있다.
부정의 정체성은 사회적 생산의 논리로 하여금 주체의 욕망들을 스스로 억제하도록 하는 교화게임에 의존한다. 하지만 그 자율적인 억제의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무수히 욕망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처벌하는 체계적인 억압들이 훈육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런 점에서 국보법은 정신분석학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국보법과 정신분석학은 실제적인 자유와 해방의 사업과는 거리가 멀다. 되레 근대적인 억압의 정치와 문화의 생산에 가담한다. 국가주의 아래 빨갱이적인 욕망을 금지하는 국보법은 가족주의 아래 근친상간적 욕망을 금지하는 정신분석학과 닮아 있다. 국가에서의 국보법은 정신분석학 가족에서의 아버지와도 같다. 국보법이 초자아권력이듯 아버지가 초자아권력이다.
그러면 대체 ‘빨갱이’는 어떻게 정의되는 것인가? 검열된 코드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의 다양한 삶들 속에 접속하는 탈영토화/탈코드화의 욕망들은 무조건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색칠되어 왔다.(주6) 빨갱이란 실존물일 수도 있었지만 조작된 가상물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렇소, 난 사회주의자요’라거나 혹은 그 반대로 ‘난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요’라고 자기증명하는 ‘빨갱이’의 실존성 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초자아권력이 자의적으로 환각물을 먹여 온 빨갱이-시뮬라크르화의 사건들에 있다. ‘빨갱이적임’으로부터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해내고 자기검열해야 하는 우리가 빨갱이컴플렉스의 희생자가 되어온 것도 빨갱이-시뮬라크르화의 사건효과에 깊이 연루된다. ‘빨갱이’는 그렇게 정의되어 오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국보법은 국민적 개인들을 뛰어난 정신분석가들로 배출해왔다. 발화-행동-기호의 시뮬라크르들에서 순간적으로 ‘빨갱이임’의 흔적들을 감별해내야 하는 빨갱이분석가. 그것은 타자분석이면서도 자기분석이다. ‘사상의 자유’의 망각 따위들을 통해서, 국민적 개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욕망을 억압-억제하는 정신분석기계가 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근대정치의 사유에서 대중들을 외눈박이와 외팔이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국보법의 역사적 임무가 아니었을까?
국보법은 처벌을 하는 억압적 국가장치이면서도 감시를 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은 ‘위’ 혹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초코드화라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국보법은 초코드화적 층위에 머물지 않고 사회체제나 개인들의 자발적 욕망 속으로 파고듦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전략적으로 실천해왔다. 그것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앞서 본 것처럼, 국민적 개인들 스스로가 빨갱이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빨갱이들을 식별, 신고해낼 수 있는 정신분석기계가 되도록 하는 임무이다. 이 정신분석기계는 정치, 관료, 학술, 예술, 교육, 매체, 일상, 문화 따위들에서 발화행위의 빨갱이적 성분들이라고 판단되는 모든 것들을 자의적으로 거세시키며 부정의 정체성을 내재화해왔다. 둘째는, 권력이 국보법을 악용한다는 일반적 비난들을 뒤로 하고 그 반대로 국보법이 권력관계들을 통제하고 표현하는 장치로 수행해온 임무이다. 국보법은 권력관계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권력관계를 제도화하고 자연화해왔다. 이것은 국보법이 ‘아래’ 즉 민중을 향해서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체제의 자기규율기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한때 소위 ‘국시’문제로 국회의원이 구속되기도 했고 대통령 후보나 국가정책 입안자들에 대한 ‘사상검증’ 요구가 제기되는 것도 지배체제가 갖는 자기규율의 부분들이다.
국보법이 이러한 역사적 임무들―초코드화와 내재화, 정신분석기계화와 자기규율기계화―을 수행하면서 보여준 것은, 그 자신이 하나의 법이 아니라 삶의 양식을 속령화하는 강력한 체제이론임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국보법은 단지 빨갱이들을 처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우경화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해내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국가주의 권력체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빨갱이적 욕망을 조작해내는 가상조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 원리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특수상황에서나 공모되고 가능할 수 있을 뿐이다. 국보법을, 우습게도, ‘역사적 임무’로 보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우익적인 근대정치체제의 수립,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반공하는 집단적 무의식으로서의 ‘부정의 정체성’ 혹은 ‘국민적 개인’이라는 주체형태의 형성이라는 것도, 자본주의적 근대정치라는 역사적 특수성에 그 역사적 특수성을 이용한 국보법의 체제이론이 결합됨으로써 완성되어 온 것이다. 국보법은 역사적 산물이자 역사적 수행물이다. 어쨌거나 국보법은, 냉소적 어법이지만, ‘역사-내-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내-존재로서의 국보법은 비극적으로 인간과 이성의 파괴라는 공식 위에서 작동해왔다. 1970년대의 그 유명한 ‘막걸리 국가보안법’이라는 별칭, ‘찬양고무죄’, ‘불고지죄’, ‘이적표현물소지죄’, ‘미필적 고의’ 따위들로 엮어넣는 처벌행태는 그 한 사례들일 뿐이다. 그 처벌행태들의 배후에는 숱한 구속자들의 항변들에서도 폭로되었듯이 불법성을 넘어 잔인한 인간파괴의 시나리오들이 꾸며져 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95년 11월, 한국인권단체협의회 등 9개 시민단체가 개최한 ‘국가보안법,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리영희 교수는 ‘괴이쩍고도 야만적인’ 국가보안법이 ‘빨갱이’ 또는 ‘공산주의자’라는 이름 아래 구체적인 욕망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non-person)로 만들어버렸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박원순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적용양태를 중세유럽과 초기 미국사를 휩쓸었던 마녀재판에 비유했다. 이러한 인간파괴적인 빨갱이 사냥은 마녀재판과 유사하게 잔인한 고문과 허위자백들을 ‘증거’로 내놓는 ‘빨갱이만들기’에서 극단화된다.
그러면 왜 국보법은 인간과 이성의 파괴라는 무기를 사용해왔는가?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적 답변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배체제와 국가권력의 역사가, 설령 지적-도덕적 헤게모니와 대중적 동의로 지배한다 하더라도, 폭력없이는 결코 현실적 힘을 가질 수 없음을 아주 단순하게 입증해줄 뿐이다. 국보법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면서도 억압적 국가장치인 것은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그와 빨갱이적 욕망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조해내는 목표지점을 향해서 조작, 고문, 회유, 협박, 유린, 사기 따위의 살인적-뇌살적 폭력들이 우발적으로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동원돼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보법은 법 안과 바깥의 폭력장치들을 통해서 집행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삼아왔다. 또한 그 폭력장치들이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요구의 상호 먹이거울의 효과로서 집행되어 왔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적이다는 것은 공무수행 차원을 말하며, 사적이다는 것은 해당관료들(수사관, 검사 등)의 밥그릇, 승진, 권력욕 등 개인적 이해관계에 얽매임을 말한다. 인간과 이성을 파괴하는 폭력성은 국보법의 공무수행 차원과 해당관료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먹고 먹히며 비추는 ‘체제-권력-욕망의 먹이거울'(주7) 게임에서 더 잔혹해졌다. 그렇게 해서 국보법은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로 무수히 만들어 왔다―빨갱이-시뮬라크르화! 국보법이 지배체제의 초코드화 및 자기규율기계화와 대중들의 내재화 및 정신분석기계화라는 역사적 임무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도 해당관료들의 공적-사적으로 얽혀진 폭력주의적 체제-권력-욕망의 먹이거울 게임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볼 수 있다.
3. 청소년보호법, 새로운 ‘도구주의적 이성’의 출현
그러나 이제는 문화의 시대다. 문화의 시대는 욕망의 새로운 스타일들이 창출된다. 지배체제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것들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문화적 욕망들은 상당히 전복적인 힘을 갖기 때문이다. 정치-경제적 상황으로만 의존하지 않는 전복의 새로운 계열화 혹은 의도되지 않은 곳들에서의 전복적 폭발. 그동안 지배체제는 문화탄압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왔고, 때로는 국보법의 이름으로 그러했다. 바로 최근의 사례들도 있다. [전복을 향하여]라는 서문제목과 관련해서 {신세대 네멋대로 해라}(1993)가, 그리고 동성애자운동을 다룬 책들인 {동성애자 억압의 사회사}(1995)와 {동성애자 해방운동과 마르크스주의}(1995)가 국보법이 적용되었다. 또 지난 1998년 3월에는 신학철 화백의 그림 <모내기>에 대해서도 대법원은 ‘이적표현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국보법으로 문화의 시대를 다스리기에는 한계가 명백하다. 어거지로 해석해서라도 국보법으로 치죄하려면 ‘체제전복기도’나 ‘이적표현물’ 따위의 단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보법이 행위보다는 사상(적 표현)의 문제에 집중되는 반면 문화는 사상이 아니라 감성적 표현행위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의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더이상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가 힘들어진다. 전복의 우발적이며 역동적인 힘은 사상이 아니라 이제 감성적 표현행위들에서 표출된다. 문화시대의 억압의 새로운 논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전에는 문화적 억압이 정치적 억압이나 경제 논리의 종속물로서였다면, 이제는 문화구성체 자체에 대한 포괄적 억압으로 전환되고 있다. 국가권력은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이제 문화적 해방의 욕망들에서 체제이탈의 절단선들을 발견해내고 있으며, 바로 그곳이 계급투쟁 혹은 ‘전쟁하는 기계’들의 새로운 장소라는 점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청보법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을 터이다.
청보법이 제정될 시기에 작가 장정일의 구속이나 화가 이현세의 소환조사 등 일련의 문화사건들이 터졌는데, 이들에게는 ‘음란문서제조죄’ 등을 적용시켰다. 동일한 텍스트일지라도 텍스트적 근거와 텍스트 생산 및 그 효과의 정세적 맥락들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이적물’로 판정받을 수도 있고 ‘음란물’로 판정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후자의 새로운 계열화에 있다. ‘음란성’은 ‘폭력성’이나 ‘유해성’과 함께 체제논리와 권력장치의 새로운 공리계로 막강하게 떠오르고 있다. 이 공리계는 심각해지고 있는 청소년문제와 관련하여 국민들로부터 광범한 지지와 공감대를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보수적) 시민운동 실천으로 연대해나가는 분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음란성이나 폭력성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미성년자보호법’,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 ‘공연법’,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등이나 그에 근거한 각종 심의기구들(주8)을 통해 처벌, 제재, 사전검열 따위들을 가해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당부분이 청소년 유해성 시비로 이어졌다. 그래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보호법이라는 좀더 포괄적인 법령을 최근에 굳이 제정해서 시행해오고 있는 맥락이 무엇이냐에 있다. 다른 심의기구들이 영역별로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심의할 영역은 그리 많지 않은데도 청보법에 근거해서 청소년보호위원회를 설치한 맥락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질문할 수 있다.
정부에서의 청보법 입법논의는 1996년 초부터였는데, 그에 앞서 청소년분야의 전문가들이 입법 제안을 해왔었다. 그런데 정부의 입법과정에서 그 성격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대체로 국무총리실은 ‘청소년보호특별법’이라는 밑그림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유해한 생활환경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문화체육부에서는 ‘청소년보호를 위한 유해매체물 규제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밑그림으로 기존의 ‘미성년자보호법’이나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은 그대로 존속시키며 유해한 매체의 규제에 초점을 맞추는 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란 속에서 제출된 법안은 국회에서 ‘유해한 매체물’을 규제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되 매체물 이외의 유해한 약물, 업소 등을 포함한 ‘청소년보호법’으로 합의했다. 청보법 제정 당시 불거진 만화탄압에 대해 만화계가 대응하면서 청보법의 은폐된 핵심은 매체탄압에 있다고 주장한 것(주9)은 이런 점에서 사안을 정확히 읽어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매체탄압’의 핵심이 국무총리실에서 밑그림 그렸던 ‘유해한 생활환경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법’의 법안설정에 연결되고 있는 점에 주목을 해야 청보법의 이데올로기적-억압적 국가장치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정확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청보법은 우선 다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청소년보호 및 청소년유해 문제를 집중적으로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청소년 폭력 및 탈선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들과 맞물려 있기는 하지만 입법의 방점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있다. 청보법이 제정될 무렵에 음란성과 폭력성을 이유로 해서 스포츠신문 만화가 등 창작자들을 단속한 몇 가지 사건들 외에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청소년들이 직접 제작하고 유통시킨 포르노비디오 <빨간마후라> 사건이다. 진보진영의 혹자는 이 사건을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보수주의 지배권력의 정국돌파용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청보법 제정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일련의 문화행위들을 체제내적 질서로 감시, 처벌, 훈육하는 새로운 규준점을 ‘청소년보호’/’청소년유해’라는 담론이미지로 압축하기 위한 여론몰이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창작물이나 방송매체 따위들을 단속하거나 제재할 때 주로 음란성 및 폭력성 문제를 앞세웠고 부차적으로 청소년들의 흉내내기를 우려하는 모방적 유해성 문제를 거론했다. 하지만 청보법이 제정되고 청보위가 뜨면서부터는 청소년 유해성 문제가 전면적으로 앞세워졌다. 국보법 시절에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빨갱이 발본색출’이라는 담론이미지로 탄압되었지만, 청보법의 시대에 와서는 청소년이든 성인이든 그 경계를 가르지 않고 사회적 행동, 문화적 권리, 그리고 표현의 자유 일체가 ‘청소년보호’라는 집중된 담론이미지로 무소불위의 힘으로 검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국보법에 은유되었던 정신분석학은 청보법의 실제기계가 되고 있다. 최근 청소년상담과 관련해서 정신분석학이 자주 동원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관련해서 둘째, 이전에는 관련법규나 각종 심의기구들이 영역별로 전문화-분산되어 있어서 자기영역의 문제들만 건드릴 수 있었는데, 이제 포괄적인 개념으로 통합되어 청소년들에게 유해하다는 단서만 잡히면 청소년보호를 명분으로 청소년과 성인 모두의 생활세계 전반 즉 ‘언제나-어디서나-누구에게나-무엇이든지’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업소, 음반, 비디오, 영화, 광고, 출판물, 게임, 컴퓨터 등 특정영역들도 더욱 집중적으로 감시하는가 하면, 그 제한된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술이나 담배도 사면 안되는 등 모든 생활세계의 일거수일투족-일화어(一話語)가 청보법의 감시망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청보법이 생활세계 모두를 초월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청소년유해성-시뮬라크르화. 1997년 7월 1일 제정, 시행된 이래 지금까지의 적용사례들 혹은 그 효과들 몇 가지만 보더라도 그것은 곧바로 드러난다. 몇 가지 유형별로 보자.
1) 과잉적용 사례
○ ‘불량만화’ 5백10만권 판금: 청보위는 청보법 시행이후 매체물 유해판정 최초조치로 1997년 7월 15일 ‘불량만화’ 1천7백종, 총 5백10만권에 대해 일괄적으로 청소년 유해판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서점과 문방구, 도서대여점 등 어느곳에서도 18세 미만 청소년에 대해 일절 판매 및 대여, 배포를 금지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만화계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 위반사범 및 ‘비행청소년’ 적발 두달새 4만여명: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1998년 12월 10일부터 1999년 2월 6일까지 두달동안 청소년보호법의 위반사범 및 ‘비행청소년’ 40,610명 적발했다. 위반사범은 청소년유해업소 종사자, 유해약물 취급자, 유해매체물 취급자로서 8,985명으로 이들을 구속, 불구속입건, 즉심으로 처리했다. 31,635명의 ‘비행청소년’은 254명이 즉심에 넘겨졌고 나머지는 보호자 등에 인계했다. 적발된 ‘비행청소년’들은 음주/흡연, 싸움 등 소란행위, 남녀혼숙, 불량만화/포르노잡지 소지 등의 행위를 했다. 참고로, 1949년 한해에 국보법으로 입건된 수자는 118,621명이었다.
2) 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한 감시와 훈육 사례
○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청소년 유해마크’ 표시: 케이블 TV와 공중파 TV에서 프로그램의 등급을 알리는 고지방송과 마크를 내보낸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청불가 영화는 적색원 안에 ’19’를 쓴 마크를, 그리고 심야영화시에는 ‘심’을 쓴 마크를 방송시간 내내 표시한다.
○ 텔레비전의 자체 감시와 홍보: 청보법 제정 당시 MBC TV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현직검사를 동원해 ‘청소년보호’와 ‘법준수’를 명분으로 구멍가게, 편의점, 술집, 서점 등을 상대로 18세 미만에게 술/담배나 성인용 도서 판매여부를 알아보는 위장실험을 하여 소위 ‘양심가게’들을 지정하였다. 이 코너는 청소년보호에 기여한 점이 인정받아 코너진행자인 개그맨 이경규가 검찰표창과 청보위의 감사패를 받았다.
3) 문화 및 창작/표현의 자유 침해 사례
○ 영화의 자체검열화: 1997년 7월, 실제 가출청소년들이 등장해 10대 문제아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선우 감독의 <나쁜영화>가 공연윤리위원회로부터 ‘등급외 판정’을 받았는데, 그 판정의 결정적인 배경은 청보법의 시행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제작진은 자체 ‘가위질’을 했다. 다른 영화들도 유사한 사례를 남기고 있다.
○ 방송출연 연예인의 복장과 행동 규제: MBC는 1997년 7월 28일부터 청보법 시행에 맞춰 연예인들이 지나치게 찢어진 청바지, 빨강과 초록 등 과도한 머리염색, 코걸이 차림을 할 수 없도록 한다고 발표했다.
○ 음반과 대중가요 규제: 1997년 10월 24일, 청보위는 유승준의 음반 <웨스트 사이드>를 유해매체물 심의를 하였고, 이에 따라 음반제작사가 부분삭제를 하였다. 1999년 3월 16일, 청보위의 의뢰에 따라 힙합가수 조PD의 음반 <조PD 인 스타덤>에 수록한 <브레이크 프리>의 가사에 남성성기를 뜻하는 비속어가 7군데 등장하는 등 유해성이 명백하다 하여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해 판매금지를 결정했다. 1999년 5월 17일, 청보위는 근친상간을 묘사한 내용의 가사를 담은 가수 김진표의 노래 <추락>에 대해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에 청소년 유해여부를 심의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도덕적 책임’을 거론했다.
4) 청소년들의 신체적 권리와 인권 침해 사례
○ 청소년 불심검문: 청보법이 시행되면서 경찰은 일상적으로 벌이는 불심검문에 청소년들을 포함시켰다. 이에 따라 경찰은 유흥업소에 드나드는 청소년들을 비롯해 학교나 공원 주변에서 중고교생들이 모여 있을 경우 검문과 몸/가방 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5)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 및 문화민주주의 침해 사례
○ 문화공간 유해화: 노래방은 청소년들이 애용하는 문화공간이다. 그런데 ‘유해환경’이라는 이유로 청소년들의 출입을 단속하여 청소년들의 비난이 쏟아져왔다.
6) 청소년들의 정치-사회적 담론에 대한 접근봉쇄 사례
○ 진보단체 회원지 ‘유해매체물’ 고시: 1997년 8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진보운동단체인 서울민주청년단체협의회의 계간 회원지 {서울청년} 8호를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고시했다. 이것은 정치/사회 관련 출판물에까지 청보법을 확대적용함으로써 청소년들의 정치-사회적 담론들에 대한 접근을 봉쇄하는 사례이다.
이러한 사례들도 부분적일 뿐이다. 청보법이 생활세계를 파고드는 눈초리들과 감시체계는 국보법이 해왔던 ‘무소불위’ 이상으로 매우 광범하다. 이 눈초리들과 감시체계가 어떻게 조직되고 합법화되고 국가장치화되고 있는지를 보게되면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청보법 시행은 국가정책적 차원과 (보수적) 시민운동적 차원의 이중적 실천이 강하게 결합되고 있다. 그런데 그 시행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고 ‘당당하게’ 시행되고 있는 것은 청소년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사회윤리적 당위성과 절박함 때문이다. 이것은 도덕주의의 내재화된 결과로 심지어 맹목적이기조차 하지만, 지배체제의 자기규율기계인 언론의 환기와 ‘명령’에서 힘입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초코드화 효과이기도 하다. 이런 사회적 당위성과 절박함을 이용하여 청보위는 또하나의 막강한 국가권력기구로 들어섰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국무총리 직속기관으로 각종 매체의 청소년 유해여부를 심의 및 판정하는 준사법적 기능을 수행한다. 게다가 공연윤리위원회, 방송위원회, 종합유선방송위원회, 간행물위원회 등 다른 심의기구들의 의견차이를 조율하는 조정권을 가지기 때문에 청보위는 사실상 모든 매체를 심의하여 유해성 결정과 행정처분을 내리는 최종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청보법 제11조는 청보위의 요구를 받은 심의기관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그에 응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 유해환경 규제에 있어 다른 법률에 우선해 적용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유해성에 대한 최종적 판정이 청보법과 청보위에 있음을 말해준다.(주10) 청보위는 각급학교 교사 및 시민단체 회원 18,000여명을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으로 지정하여 청소년 유해물들을 감시하게 하며, 특히 교사의 경우 적발된 유해업소 업주들로부터 자인서를 받아 관계기관에 고발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주11) 또한 청보위는 청소년보호업무 공무원 1,000명에게 ‘청소년경찰’의 이름으로 청보법 위반사범을 단속/수사할 수 있는 사법권을 부여하기조차 했다. 이것은 명백한 국가권력의 남용이자 오도된 시민권력의 팽창을 초래하는 행위이다. 청보법은 또 어린이와 청소년의 생활환경을 걱정하는 시민 30명 이상의 서명만 있으면 청보위의 위임을 받아 ‘언제나-누구나-어디서나’ 유해매체물을 규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보법을 대신해서 이제 모든 ‘선/악’의 판정잣대는 청보법과 청보위로 옮겨가고 있다.
더군다나 청보위는 국가기구이다. 여기에는 또다른 음모가 있어 보인다. 다른 심의기구들이 민간자율기구로 이전되고 있는 추세를 허용하는 듯 하면서 그 민간자율기구화되는 심의기구들을 국가주의/관료주의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옥상옥 국가권력기구로서 청보위를 파악할 때 문제상황은 또 달라진다.
오늘날 청소년 유해환경 문제는 심각한 사회적 의제이다. 폭력, 약물중독, 왕따, 범죄, 성폭행, 윤락행위 등 죽음으로 가는 청소년들의 탈주선들에 대해서는 생명윤리적 문화교육을 통해 삶의 탈주선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식의 청소년정책/청소년교육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법령과 기구들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다 유용한 것은 아니다. 특히 청보법과 청보위는 대중적 공감대를 가질지는 몰라도 청소년들의 정서와 거리가 멀 뿐더러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서 나는 청보법이 모든 것들을 ‘청소년보호’/’청소년유해’ 칼날로 들이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생활세계 전반 즉 ‘언제나-어디서나-누구에게나-무엇이든지’ 감시하고 처벌해오고 있다고 논했다. 이점을 이제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보자.
첫째,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망들을 억압하는 데 전략적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보법이 배려나 장려보다도 지나치게 제재와 처벌 위주로 시행되고 있다는 비판들이 많다. 입법 및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청소년보호’냐 ‘매체의 통제냐’라는 반발은 가장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법조항들을 보면 표현의 자유와 영업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 많고, 실제로 관련분야나 업계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왔다. 당사자들인 청소년들도 청보법에 대해 냉소적이거나 위반적이다.(주12) 청소년들은 청보법에 따른 노래방 단속을 가장 비난하였다. 청소년들의 문화공간을 더욱 확대해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되레 탈선의 장소라는 이유로 청소년들을 그곳들로부터 내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청보법은 가령 청소년단체들이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매체물을 제작하거나 지원할 경우 그에 필요한 사업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점은 결국 청보법이 청소년들의 문화적 욕망들을 무조건 억압만 하려는 데 목표가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즉 청소년들의 욕망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길들이고 통제하여 사회적 생산의 논리와 부합하도록 하는 욕망의 배치전략에 더 근본적인 함의가 있다는 것이다. 억압은 그러한 전략에서 수행되며, 이른바 ‘탈선’이라는 죄명으로 감시와 처벌이 정당화된다.
둘째, 욕망의 억압 및 배치전략은, 앞의 사례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 문화민주주의, 인권, 신체의 권리 등을 침해하는 동시에 사회적-정치적 담론에의 접근마저도 통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청보법 제10조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 제4항은 ‘청소년유해매체물’을 "청소년의 건전한 인격과 시민의식 형성을 저해하는 반사회적, 비인륜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서울청년} 8호에 적용한 사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있는 독소조항이자 자의적 판정조항이 될 수 있다. 국보법이 ‘이적성’을 무기로 하여 마녀사냥을 즐겼듯이 청보법은 ‘유해성’을 무기로 그렇게 할 것이다. 청보법의 지지자들은 유해환경들로부터의 청소년보호를 위해 표현의 자유마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논리는 성인 창작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청소년 자신들의 표현 및 소통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이 사회-정치적 존재이자 자기결정권을 가진 자율체임을 부정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청소년들도 엄연한 대중이다. 오늘날 대중문화는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청소년들이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욕망하는 주체임을 알지 못하고 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보호대상’이 아니라 욕망하는 주체로 보아야 한다.
셋째, 청보법은 생활세계 모든 곳에 개입하면서 철저하게 성인의 세계와 미성년의 세계를 인위적으로 분리해냄으로써 새로운 적대전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유해마크 표시와 비디오, 책, 만화 따위들의 ‘성인용’과 ‘청소년용’의 구별이 그것들이다. 심지어는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광고 때문에 일반잡지들이 ‘성인용’으로 포장되어야 하며, ‘유해한’ 내용의 간판, 벽보, 전단 등을 공중이 통행하는 장소에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업소와 매체물에 집중적용되어 왔으며, 청보법이 개정된 1999년 7월부터는 이른바 ‘청소년통행금지구역'(Red Zone)이 지정운영되므로 거리공간에서도 적용될 전망이다.
여기서 우려할 점은 우선 ‘유해성’ 판단과 영화의 등급판정이 상당히 자의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영화들에서 폭력행위가 한두 장면에 불과한데도 ’19’나 ‘심’ 표시를 한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이런 자의적 결정은, 무리하게 성인의 세계와 구별지움으로써 청소년 세계를 순수 그 자체의 세계인 양 환상에 빠지도록 허구화하고, 또한 인간세계의 다양한 문화경험들을 차단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문화적 권리와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근대적 시민혁명에서 제출된 ‘자유’의 이념은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남자의 자유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폭로하였듯이, 마찬가지로, 청보법은 오로지 성인의 자유만을 주장한다. 그리고 청소년의 자유는 성인의 세계와 미성년의 세계라는 이분법에 의해 삭제당한다. 이것이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넷째, 그런데 성인의 자유만을 주장한다 해도 청보법이 성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부여해주는 것도 결코 아니거니와 결국은 성인들의 세계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새로운 지배원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는 것이다. 청보법은 청소년법이자 성인법이다! 그 법령의 효력은 청소년들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탈선한’ 청소년들을 단속하는 동시에 그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빌미를 제공한 성인들을 감시/처벌하는 데 두고 있다. 국보법이 위반대상을 주로 성인들에게서 찾아 온 반면 청보법은 성인들과 청소년들을 망라하기 때문에 국보법보다 더 절대적이다. 청보법은 사실상 모든 인구를 대상으로 벌이는 새로운 전쟁기계이다. 청보법은 국보법이 정치윤리적으로 호출했던 ‘국민’/’국민적 개인’의 이미지를 이제 사회윤리적으로 ‘시민’/’시민적 개인’으로 호출하면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전쟁기계에 힘을 가속도로 실어주고 있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청보법을 가장 환영하고 가장 철저하게 더욱 확대하여 시행할 것을 촉구해오고 있는, 그야말로 유해집단이다.
청보법은 도덕주의적 사회윤리에 호소하기 때문에 까놓고 반대하기에는 곤혹스러운 점이 있다. 청소년들을 유해환경들로부터 보호하자는 데 반대했다간 ‘국민정서’에 몰매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진보적인 매체들도 표현의 자유 문제를 제외하고는 청보법이나 청보위에 대해서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심의기구들을 민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민간화되는 심의기구들을 상위권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기구의 옥상옥(청보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청소년보호라는 협소한 테두리만 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청보법이 국민정서를 이용하는 악법이라는 것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국보법이 정치적 반공이데올로기로 조작되어진 반빨갱이 정서에 기초해왔다면, 청보법은 사회-문화적 도덕이데올로기로 습속화된 반유해성 정서에 기초한다. 국보법이 폭력성 및 인간과 이성의 파괴로 일관해왔다면, 청보법은 도덕이데올로기에 기초하는만큼 인간과 이성에 호소한다. 텔레비전의 출연자들이건, 시민단체의 도덕주의자들이건, 아니면 일반시민들이건, 일간신문의 사설들이건, 많은 사람들과 논평들은 갖가지 문화현상들에 대해 청소년들에 유해하다며 시시콜콜 시비거는 일이 부쩍 잦아진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다.
그러나 청보법 혹은 시민주의적 이성은 감성적 욕망들을 고의적으로 말초적 감각(음란성) 또는 유해적 표현(유해성)으로 몰아붙이는 한편 그 시선을 항상 감시와 처벌이라는 판옵티콘적 체제이론으로 악순환시키는 도구주의적 이성에 불과하다. 청보법은 이성을 지배체제를 위한 도구주의로 사용하고 있다. 그 도구주의는 감성적 욕망들의 탄압과 파괴라는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국보법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 이성을 감성적 욕망들(카오스)을 재단하고 또 그것들을 산출하는 카오이드(chaoid)적 힘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말이다. 삶의 양식을 일괴암적으로 결정짓고 명령하는 역사적 임무는 국보법에서 청보법으로 이동하면서 이성을 복구하는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도덕주의의 얼굴을 가장하여 이성을 파괴하는 새로운 야만의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청보법은 탈근대적 문화조건이라는 새로운 역사성에 대응하는 논리로 출현하였지만 도구주의적 이성이 지배하는 ‘근대적 감옥주의’의 낡은 버전에 불과하다. 즉 청보법은 지배체제로부터 탈영토화/탈코드화하는 탈근대적 주체형성을 지배체제로 재영토화/재코드화함으로써 국보법의 역사적-현실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문화시대의 사회체제 이론인 셈이다.
4. 징후: 일상에서 새로운 사회적 적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청보법의 역사적 임무는 무엇일까? 국보법과 청보법은 전혀 다른 층위이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의 삶을 근대적 감옥주의로 다스리는 지배체제의 논리라는 점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 근대적 감옥주의는 경험 및 상상의 세계 모두를 감옥이라는 표상체계로 영토화한다. 근대성은 감시와 처벌이라는 감옥주의를 특징으로 하는데, 감옥은 더 이상 격리된 콘크리트벽으로 박제화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자체가 거대하고도 미시적인 창살없는 감옥들의 거미줄로 표상된다. 다시 말해 감옥주의는 죄진 신체들만을 잡아가두는 게 아니라, 죄없는 신체들, 감성들, 욕망들, 상상들, 언어들, 행위들을 사회적으로 등록시키고 분류하고 검사하면서 끊임없이 처벌의 대상으로 훈육함으로써 사회지배체제를 구축한다. 수없이 늘어나는 법령들은 감옥주의가 더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청보법이 청소년들을 욕망하는 주체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보호대상으로 설정하는 것도 감옥주의적 발상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감옥주의는 범죄와 같은 사회적 부작용들의 처벌기제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생산의 논리와 욕망하는 주체들의 적대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체제의 내재화된 논리이자 근대적 실천의 헤게모니화된 권력생산기계로 작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정치에서 문화로 국가권력행사의 장소가 중층화되면서 국보법이 수행해 온 역사적 임무들―초코드화와 내재화, 정신분석기계화와 자기규율기계화―이 자연스럽게 청보법으로 고스란히 이전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국보법이 대중들의 근대정치적 사유를 외눈박이와 외팔이로 만들었듯이 청보법도 그러할 것인데, 그러나 청보법은 대중들의 탈근대적 문화욕망을 그렇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향적 추세에서도 국보법은 언제든지 시퍼런 칼날을 추켜세울 것이다. 국가권력장치들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부분들과 새롭게 맞물리며 재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세기’ 운운하면서도 여전히 근대적 감옥주의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낡은 정치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너무 불행한 일이다. 청보법이 국보법 이상으로 억압적 장치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부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너무 불행한 일이다. 이런 불행들을 선사하면서 청보법이 출현한 것은 그만큼 탈주하는 대중들의 욕망정치가 확대되고 있음에 대한 지배권력의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말해준다. 청보법이 신세대의 문화전복 이후에 등장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탈주하는 대중들의 욕망정치에 대응하는 청보법의 전략은 새로운 적대전선을 창출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해나가는 문화정치의 지배체제적 전유에 있다. 청보법의 중핵적 전략의 하나는 새로운 적대전선의 구축에 있다. 청보법은 각종 매체, 공간, 거리, 시간을 ‘청소년용’과 ‘성인용’으로 구별한다. 이 이분법은 대중들의 자연스럽고 자율적인 문화적 판단을 무시하고 사회적 생산의 논리에 욕망하는 주체들을 꿰어맞추는 인위적, 제도적, 위계적 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성인용과 청소년용의 이분법적 구별은 첫째, 대중들의 문화적 욕망들을 지배체제의 논리에 종속시키고, 둘째, 그 분리된 각각의 욕망들을 스스로 고립하게 하면서도, 셋째, 대중들의 문화적 욕망세계를 성인의 세계와 청소년의 세계로 충돌하게 하는 적대전선을 창출해낸다. 이러한 적대전선의 효과는 지배계급의 직접적 관여없이도 피지배계급 내―교사:학생, 부모:자식, 시민:청소년 등―에서 욕망정치를 둘러싼 세대계급간 갈등을 심화시킬 것이며, 그에 따라 지배계급은 욕망의 정치를 전략적으로 배치하면서 지배조건들을 더욱 유리하게 확보해나갈 것이다. 청보법에 따른 적대전선의 형성은 1990년대 대두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문화정치/문화전쟁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
국보법이 정치적 적대전선을 통해 국가권력과 지배체제를 생산해 왔다면, 이제 청보법이 세대간 적대전선을 통해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적대전선의 이동은 권력이 정치권력으로만 행사되는 게 아니고 문화권력으로도 대두하고 있으며, 지배체제가 정치적 사회체제로서만 구축되는 게 아니라 문화적 사회체제로도 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청보법은 1990년대 논의에서 부각된 권력들/체제들의 복수성 및 중층성이 구체적 혹은 비가시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전략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청보법 문제는 단순히 청소년들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권력 및 지배체제의 중층화와 재배치가 만들어내는, 일상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적대의 생성이라는 점에서, 문화시대의 대중정치와 관련된 징후적 문제상황이다.
새로운 곳에서 미지의 해방의 욕망들이 창발되는 한편, 그반대로, 구태한 억압의 정치들도 속출된다. 거기서 우리는 문화정치의 이중과제를 안게 된다. 그래서 문화는 거저 주어지는 해방구가 아니라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써야될’ 전쟁터이다. 욕망투쟁의 전쟁터. 이 의제는 좌파정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미주>
1) 1997년 9월 10일, 12개의 진보단체들이 연대하여 ‘표현의 자유’ 탄압정국과 관련하여 <문화예술 검열철폐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발제자인 강내희 교수는 표현의 자유 탄압정국을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의 지배논리로 인식하였다.
2) 가령, 1995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기소자들을 하급심에서 이례적으로 무죄석방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또 시사주간지 <뉴스 플러스>는 1998년 12월 3일자에서 현행 국가보안법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하면서, "현행 국가보안법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라는 설문에 대해 응답자의 83.6%가 "현 국가보안법을 완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대답했고 "아무 문제없다"는 16.4%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3) 나는 다른 글에서 지배화와 권력화의 욕망이 변이적 힘들을 ‘체제들-권력들-욕망들의 먹이거울’로 수렴하고 착취해가는 체제재생산의 메커니즘을 ‘변이의 정치학’이라는 분석틀로 개념화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 점에 한해서 변이의 정치학은 지배화/권력화의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변이의 정치학은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인 ‘욕망-생성-탈주하는 소수자되기’라는 소수화의 욕망으로 내달리기도 한다. 소수화의 욕망주체는 지배화/권력화의 욕망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리기 때문에 혁명적 분열자로 움직인다. 나는 지배화/권력화의 도구를 ‘변이의 정치학 I’로, 소수화의 욕망정치를 ‘변이의 정치학 II’로 구별하여 사용한다. 이 분석틀을 사용한 것은 애초 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체문제와 관련하여 변이분석적 방법에서 연구해보자는 의도에서였는데, 나아가 체제재생산 혹은 체제전복의 변이적 특이점 등을 분석하는 데에도 유용할 수 있다고 본다. 고길섶, [대의민주주의 비판과 변이의 정치학들], {문화과학} 18호(1999년 여름) 참조.
4) 그렇다고 지배적 억압체제의 역사적 임무들을 국가보안법과 청소년보호법으로만 환원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한 계열을 중요하게 논의할 뿐이다.
5) 우리나라에서 개인들은 ‘국민’이라는 국가주의적 호출이 자명하게 전제되지 않고서는 사회적 존재로 주체화되지 않는다. 1960년대 도입된 주민등록제도는 그 결정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국민적 개인'(혹은 ‘국민화되는 개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국민적 개인’은 개인들을 정치적으로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으로 호출하면서도 동시에 사회문화적으로는 개인주의자로 이산 혹은 고립시키는 효과를 생산한다.
6) 1948년, 채만식은 소설 {도야지}에서 ‘빨갱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불원한 장래에 사어(死語)사전이 편찬된다면 빨갱이라는 말은 당연히 거기에 오를 것이요, 그 주석엔 가로되 1940년대의 남북조선에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단지 추잡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밖에도 XXX와 OOO당의 정치노선에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7) 주 4) 참조.
8) 영화, 비디오, 음반, 새 영상물을 심의하는 공연윤리위원회, 만화 등 출판물을 심의하는 간행물윤리위원회, 지상파방송을 심의하는 방송위원회, 유선방송을 심의하는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컴퓨터통신을 심의하는 정보통신위원회 등이 있다.
9) 박재동, [창작활동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에 관하여], ‘문화예술검열 철폐를 위한 토론회'(1997년 9월 10일) 발제문 참조.
10) 실제로 1999년 봄에, 청소년들로부터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컴퓨터게임물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무해판정을 내렸고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는 유해결정을 내렸는데, 청보위가 최초로 조정권 행사에 들어가 "청보위 조정에 의한 최종결정이 있을 때까지 공진협 유해판정의 효력은 지속된다"고 밝힌 바 있다.
11) 이 감시단은 유명무실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례로 시민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 배치된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 40여명은 1998년 11월 현재 3개월동안 서울시내 편의점 520여곳을 대상으로 방문활동을 통해 유해간행물들을 ‘자진퇴출’시키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12) 서울시 청소년 종합 상담실이 1998년 3월 790명의 서울시 거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조사에서 청소년보호법 시행이 "청소년에게 도움이 된다"는 응답이 37.8%에 불과했으나, "있으나마나한 법" 응답이 28.5%, "지나친 규제" 응답이 24.1%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청소년 시청금지 프로그램 시청, 술/담배 구입, 성인용 잡지/만화/비디오 구입 혹은 빌린 경험이 각각 75.0%, 43.2%, 34.3% 씩이나 될 정도로 ‘위반행위’를 자유롭게 했다.
2000-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