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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슈나이어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서평{/}[함께 읽는 정보인권] 디지털 시대의 파놉티콘 속에서

By 2018/01/15 1월 30th, 2019 No Comments

글쓴이│시간의 점



행동을 바꾸어 감시를 피할 수 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대신 현금으로 물건 값을 치르거나 교통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도로로 운전할 수 있다. 자녀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거나 온라인에 아이들 사진을 태그해서 올리는 일을 자제할 수도 있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P.326

편의점이나 마트에 갈 때마다 일일이 현금 결제를 하려면, 호주머니가 불룩하게 잔돈이 쌓이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포인트 적립이나 카드 할인을 받지 못하고, 연말정산을 통한 세금 절감 혜택도 받지 못한다. 현금을 쓰더라도 현금영수증을 요청해서 받는 순간 역시 기록이 남는다. 언제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샀는지.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꿋꿋하게 “내 정보는 소중하니까요.”라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린 것이 아닌가. “나는 스마트폰이 싫어요.”라는 생각을 꺼내놓는 순간, 과거 어느 시간대로부터 타임슬립을 통해 현재에 뚝 떨어진 사람 취급을 당할 수 있다. 한동안은 남들이 스마트폰을 다 살 때까지 스마트폰을 사지 않고 버티는 것도 너무 힘이 들었었다. 건너가기 싫어도 건너야 하는 강, 어쨌든 이미 건너버리고 만. 내 손 안의 감시자.

영화 「감시자들」 초반부에 정우성은 은행을 털기 위하여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옥상 주차장에 있는 차를 폭파시키려 접근한다. 그는 감시카메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해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재빠르게 이동한다. 감시카메라에 찍힌 것은 쨍한 햇빛과 어떤 인물인지 전혀 단서를 찾을 수 없는 빛 속의 희미한 형체뿐. 결국 감시카메라에 기록이 남는 건 범죄자가 아닌 선량한 시민들뿐일까. 작정하고 감시를 피하는 사람들을 찍을 수 없다면, 누구를 감시하기 위한 카메라인가.


영화 「감시자들」의 한 장면

영화 속에서 정우성 일당의 덜미가 잡힌 것은 그들 중 한 명이 편의점에서 사용한 교통카드 때문이었다. 편의점 CCTV에 용의자가 찍힌 바로 그 시간에 결제 단말기에 찍힌 카드를 특정하고, 그 카드의 이용내역을 참조하여 범인의 거주 지역을 좁혀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감시반의 잠복 활동으로 범인이 사는 아파트 호수까지 파악하게 되고, 감시반은 그 복도에 촘촘히 감시카메라를 설치한다.(나는 이 대목에서 같은 복도에 사는 옆집 사람은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하루 종일 카메라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겠구나 싶었다. 영화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옆집 사람을 걱정하다니, 나도 참.)


영화 「감시자들」의 한 장면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와 우연히 같이 읽게 된 『감시국가』(“스노든을 아세요?”라는 질문에 나는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고 있던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를 꺼내보였고, 그는 『감시국가』를 내밀었다. 아마도 모른다고 대답했다면 받지도 못했고 읽지도 못했겠지…….)는 “국가감시는 국민의 자유를 지키는 정당한 수단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 두 명, 반대하는 입장 두 명이 각각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서로 토론한 현장을 지면으로 옮겨놓은 책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매년 주제를 정해 열린다는 멍크 디베이트에 토론자로 나선 사람은 전직 NSA(National Security Agency, 미국 국가안보국) 국장, O. J. 심슨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전직 하버드대 법학자, 《가디언》 기자였던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미국 소셜 웹사이트 레딧 공동 창업자. 각각의 발언이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펼쳐진다. 토론 참여자 중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의 발언 한 대목.

“지금 가동 중인 NSA 프로그램이 당시 있었더라면 9.11 테러를 막았거나 이 공격 음모를 분쇄할 수 있었을 거라는 식의 추정은 미국 국민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 특히 서구인들에게 격앙된 분노뿐 아니라, 미국 내에 있는 주요 알 카에다 전문가들의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는 미국을 대체로 옹호하는 전문가들조차 그런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중 한 분인 국제안보문제 전문가 피터 버건은 2013년 12월 30일 CNN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일갈한 바 있습니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9.11 테러를 예측할 만한 정보가 없었다는 것이 정말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경고에 대응하지 못한 책임은 부시 행정부의 정책 실패지 미국 정보기관의 첩보 실패가 아닙니다’라고 말이죠…….

또 다른 전문가 로렌스 라이트도 2014년 《뉴요커》에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9.11 테러가 일어난 것은 정보기관이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수집해 음모를 막는 데 필요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습니다.”

멍크 디베이트 토론 중간에 동영상으로 깜짝 등장한 스노든.

“이것이 오늘날 국가감시의 양상입니다. 이러한 감시가 전화 통화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시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검색 기록, 구글에서 검색한 모든 내용, 구매한 모든 항공 티켓을 감시합니다. 아마존에서 구매한 책이 무엇인지, 평문으로 작성된 거래 내역이 어디로 보내지는지 지켜봅니다. NSA가 될 수도 있고 외국의 다른 정보기관일 수도 있는데 누구든,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꽤 오랜 기간 동안 저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시에는 여러분의 친구가 누구인지, 어떻게 그들과 소통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또한 여러분이 어디에 가는지,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국가감시 업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디 사는지를 보여줍니다. 자, 이런 종류의 위헌적이고 저인망식인 감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남용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종류를 해결할 수 이도록 시행 중인 정책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이 바뀔 때마다, NSA에 국장이 새로 부임할 때마다 변화를 거듭하는 정책들이 미국 내부에 늘어나는 위협을 정말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요? 정부가 이런 종류의 억압 구조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일상의 작은 부분들에서 내 데이터를 지키려는 노력을 각자의 수준에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나는 이미 내 노트북의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지 못하도록 카메라 앞에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사실은 노트북이 나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망을 타고 노트북 카메라를 통해 누군가 나를 감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만, 기계 뒤의 사람에 대해서는 의식하기란 참 쉽지 않다.), 감시가 통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불필요한 정보가 과잉 수집되어 남용되지 않도록 필요한 정책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데이터의 주인이 언제나 선한 의도를 가진 기관/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 건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 누구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위험하지 않도록. 불확실한 두려움에 지지 말고.

두려움은 위협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역사에는 사회가 안전을 지키기 위해 권리를 포기하지 않은 사례가 수두룩하다. 아네르스 브레이비크가 2011년에 끔찍한 대학살을 자행한 뒤에도 노르웨이는 자유와 개방이라는, 국가의 핵심 가치를 지켜왔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라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언도 있다. 불굴의 의지야말로 테러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P.349

 

우리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묘사된 독재 정부, 또는 여러 음울한 사이버펑크 SF에서 묘사된 기업에 지배받는 국가가 등장하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이런 종말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기차는 양방향으로 모두 향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제동을 걸어야 한다.

『당신은 데이터의 주인이 아니다』 P.343

 

※ 이 글은 ‘반비 출판사 블로그’에 연재된 ‘디지털 시대의 파놉티콘 속에서’ 네 번째 글입니다.

편집자주 : <함께 읽는 정보인권>은 정보인권 관련 외부 서평글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글의 내용이 진보넷의 입장과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또 다양한 입장과 견해가 섞이며 조금씩 정보인권의 외연이 넓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