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담배 피다가 PC통신 하던 시절, 그러니까 90년대 후반 즈음, 특정 성향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참세상’이라는 PC통신 서비스가 알려졌던 적이 있다. 하이텔 나우누리와 달리, 노조든 학생운동 조직이든 기업 차원의 검열 걱정도 없이 마음껏 폐쇄사용자그룹(CUG)를 만들 수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대단한 위업인가. 나아가 접근권과 공유정신부터 프라이버시권까지 정보 인권이라는 뭔가 미래파 사회운동 사안을 결합하여 무려 인터넷 공간까지 확장하며 진보넷이라는 큰 틀을 제시했다.
사회 참여에 관심 있고 디지털 환경에 친숙해지기를 겁내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좀 덕후 기질이 있는 이들에게, 진보넷은 멋들어진 놀이터였다. 적어도 나는 딱 그랬다. 참세상 공간에 ‘진보적 만화 읽기’를 표방한 만화동호회 [아가툰]을 만들었다가 그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결국 지금은 나름 경력 있는 만화평론가다. 사회운동과 정보화의 역사에 대한 석사논문을 쓰려다보니 결국 태반이 진보넷 사례가 되었고, 그것 또한 어떤 계기가 되어 지금도 매체 환경과 사회 진보의 연관에 대해 그럭저럭 화두를 꺼내려고 글질을 하는 흔한 미디어학자1이 되어있다.
하지만 진보넷이 이런 과거 인연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주욱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당시 동호회 게시판 같은 옛날 자료마저 전부 삭제되지 않고 보존하는 훌륭한 아카이빙도 좋고, 사회운동에 대한 정보공간 지원 사업에 앞장섰던 시절의 기억도 좋다. 하지만 정보인권 영역의 사람들과 담론들을 모아내고 자료를 축적하며, 지금도 며칠이 멀다하고 정보인권관련 사안에 대해서 새로운 자료, 새로운 성명이 메일링리스트로 도착하는 지금이 바로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진보넷 활동가들이 너무 스스로를 갈아 넣는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오랫동안 현재형이기에, 주민등록번호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십수년전의 씨앗이 정말로 열매를 맺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검열의 주체를 따지는 것이 기술적 문제 이상의 정치 사회적 안건임을 모두가 공감하는 과정을 함께 했다. “테러”방지법 같은 폭넓은 악법에 대해 이미 십년 이상 묵은 탄탄한 논리로 거의 실시간 반박해내는 관록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진보넷에서 내가 얻어온 가장 커다란 효용은 추억도 유용한 자료도 아니라, 사회 진보를 위해 필요한 것을 결국 꾸준한 전문성과 끈질긴 지속력이라는 역할 모델인 듯싶다. 그리고 다시 십 오년 쯤 후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꼭 그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