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액트온

아랍 민주화 운동과 대안 미디어의 역할

By 2011/03/25 10월 25th, 2016 No Comments
백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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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민주화 운동과 대안 미디어의 역할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집트 혁명과 대안미디어

18일간의 혁명이 30년 독재를 뒤집어엎었다. 혁명은 그렇게 온다. 춤추고 노래하고 울고 껴안고 마음껏 기뻐해라. 승리의 날이니까. 그러나 혁명은 어느 날 이별의 말도 없이우리 곁을 떠나간다.”

125일 처음 이집트 시위가 시작될 때 누가 오늘을 예측했을까?

사진은 뉴욕타임스 글로벌판 2011210일자. 젊은이들이 랩탑으로 해방광장에서 찍은 비디오를 올리고 있는 사진. 밝고 활달하고 혁명적인 기운이 감돈다.

어디서나 희망은 젊음에서 나온다. 초기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조직했던 청년 운동가들이 시위 집결지에 대한 허위정보로 경찰의 감시와 방해를 따돌리고, 빈민 지역에서 50명으로 시위를 조직하여 해방광장에 도달할 때는 수천 명이 되었다. 반혁명세력이 무력을 휘두를 때 그들은 쇠망치로 돌을 깼고,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돌맹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늙은 야당 인사들은 현재 집권층에 의해 길들여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의 자세가 신선하다. 기독교도 여성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걸작이다. "제대로 된 정부이기만 하다면 원숭이가 대통령이라도 상관없다."

젊은이들 못지않게 창의성을 저항과 연결시키던 엘 사다위(El Saadawy)도 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무바라크에 의해 많은 탄압을 받았던 그녀는 이집트로 돌아와 해방광장 시위에 동참했다. 전문 직종 지식인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를 가차없이 배신자들이라고 이야기하는 80세 할머니의 당찬 태도가 부럽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팬티를 벗어 무바라크에게 주었다고 비꼰다. 반면 타흐리르 광장의 텐트 속에는 새로운 역사가 싹트고 있음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 텐트 속에서 처음 보는 남녀가 함께 자고, 아기가 태어나고, 사랑이 싹트는 것을 찬양한다. 분명 혁명은 그런 것이다. 해방광장은 새로운 도시다. 그것은 새 날의 결혼이며,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껴안는 혁명의 연애이다. 이것이 남과 여, 종교의 차이를 한칼에 부숴버리는 혁명의 힘이다.

왜 이런 나라에 대한 관심이 우리에게는 그저 파라오와 피라미드 정도에 멈추었을까? 이집트에 대해 뭐 별로 아는 게 없다. 미국을 조종하는 유대인의 시각과 미국의 입장과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한국의 정치문화 풍토에서 이집트는 밥맛없는 후진국 정도로 인식되어서 그럴까? 아무튼 이 위대한 나라의 민중은 이제 기지개를 펴고 포효하기 시작했다. 21세기를 멋지게 연 이집트 민중이 자랑스럽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뒤바꿔 놓을 것이다. 어렵게 얻어낸 민주주의를 15년 만에 까먹고 있는 우리 현실이 부끄럽다.

미국의 조사기관 PEJ(The Project for Excellence in Journalism)가 발표한 주간 뉴스 보도 지수(News Coverage Index)를 보면, 지난 131일에서 26일 일주일 동안에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미국 뉴스의 56%를 차지하였다. 이는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차지했던 비율보다 높다고 한다. 자국 군대가 파견된 전쟁보다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더 많은 언론의 주목을 끌고 있다. 세계는 왜 이집트 민주화 운동을 주목하는가? 이집트 민중이 2011년 세계의 정치 질서와 중동 지역의 정세를 혁명적으로 변혁시킬 수도 있는 시위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근대적인 독재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하는 근대적인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제국 질서에 균열을 가할 수 있는 매우 현대적인 힘이다. 미국에 의해 억지로 유지되고 있는 불안정한 중동 지역 정세에도 지층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비교적 세계의 변방이고 상대적으로 전현대적인 이집트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위는 거꾸로 너무나도 미래적인 현실이다.

정치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 차원에서도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CNN 등 미국 언론보다 알자지라가 현실보도의 질과 영향력 차원에서 모두 앞섰다. 대중 스스로가 미디어가 되는 인터넷 시대의 시위에서 알자지라(Al Jazeera)와 데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 http://www.democracynow.org/)는 인터넷 시대의 저널리즘의 형식과 내용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들은 미디어일 뿐이고, 주인공은 이집트 민중이다. 데모크라시 나우는 진보적 저널리스트들이 만든 독립 방송국으로서 하루 한 시간 방송한다. 주류 언론이 건드리지 않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전쟁과 평화, 민주화 운동을 주로 다룬다. 데모크라시 나우는 시청자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독립 저널리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데모크라시 나우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더 멋져 보인다. 독립 저널리스트나 개인의 집중탐사보도. 우린 그런 거 별로 없다. 기껏 추적60, 피디수첩. 그것도 요즘은 아쉽지만. 데모크라시 나우에서 촘스키와 인터뷰하는 아미굿맨(Amy Goodman)이 대표적 탐사 저널리스트다. 53세의 그녀가 KBS 뉴스 캐스터보다 얼마나 젊고 멋진가.

이와 더불어 위키리크스도 인터넷 시대 새로운 언론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 대사관 전문은 튀니지 시위의 단서를 제공하였고, 이집트 민주화 시위가 진행되던 시기에도 대사관과 이집트 관료 사이의 대화를 유출하면서 부패한 정부의 실태를 폭로하였다. 그런가 하면 알자지라는 이번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통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언론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알자지라는 이집트 현지에 7개 팀을 보내 취재를 전개하였고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스트리밍으로 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했다. 알자지라는 현장에서 취재하고, 인터넷으로 알리고, 자사가 만든 뉴스를 자유롭게 열어놓는 ‘현장의 열린 방송’을 실현하였다. 알자지라는 1년 전 영상 뉴스를 크리에이티브 라이선스(CCL)로 공개하였지만, 이번의 뉴스 공개는 사뭇 의미가 크다. 연예 오락 프로그램 만들어 푼돈이나 모아가는 한국 방송사들과는 생각의 스케일이 다르다. 이집트 민주화 혁명에서 알자지라는 인터넷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트위터를 통해 올라오는 정보를 취합하거나 정보 소스로 활용하였다. 인터넷 홈페이지의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으로 지리적 장벽을 넘어 폭넓게 뉴스를 전달하였다. 서방세계의 일방적이고 편향된 시각에 대항하여 이집트 시민의 관점에서 사태를 평가하는 논조를 흩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현장의 사실에 충실했다. 그 결과 이집트 정부가 130일 반정부 시위를 실시간으로 보도하던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 카이로 지국을 폐쇄한 데 이어, 31일에는 알자지라 기자 6명을 한때 체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집트 정부의 미디어 차단책

페이스북, 트위터 활용 –> 트위터 폐쇄(1/25) –> 인터넷 단절, 이동전화 단절(1/27) –> 이동전화복귀(1/28), 내외부 소통단절 –> 인터넷 재개(2/2).

이집트 당국은 무엇을 어떻게 막았는가? 그들은 트위터 서비스를 금지하고, 인터넷 자체를 불통하게 만들었고, 국영방송만 남기고 알자지라 및 해외 언론을 통제하였다. 어디나 돌대가리들이 권좌 옆에 포진하고 있다. 이집트 당국의 인터넷 절단이 오히려 이집트 시위의 폭발적 확산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선도적 활동가들의 페이스북 활용은 서로 간에 시위 날을 잡고 연락하는 초기에 그 역할을 다했다. 이번 시위 이전 2005년부터 이집트에서는 인터넷을 활용한 시민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왔다. 한 예로 ‘Shayfeen.com(우리는 당신을 보고 있다, we are watching you)을 들 수 있다. 이집트의 전직 국영방송 캐스터 보사나 카멜(Bosayna Kamel)그들의 뉴스를 달달 읽다가, ‘실재 현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사직한 후, 2006우리는 당신을 보고 있다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러한 움직임들이 이번 시위를 촉발하고 이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다음 대중이 형성되기 시작하면 시위는 경찰과의 싸움을 통해 확대재생산 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을 끊어봤자 해외에서 이집트 시민을 향한 지지 여론은 트위터 등의 미디어를 통해 더욱 확장된다. 어떤 돌대가리 작품인지 인터넷 역사에 남을 짓만 하나 확실히 해냈다.

인터넷이 없던 127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의 이집트 정세는 뉴스 허브로서의 알자지라와 무수한 현장 운동 참여자간의 결합을 통해 전개되었다. 이번 이집트 시위에서 또 하나 눈에 두드러지는 현상은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의 활용이다. 트윗과 리트윗으로 혁명을 할 수는 없지만 혁명을 퍼뜨릴 수는 있다. 이집트 당국에 의해 끊겨버린 인터넷 망의 조금 열린 개구멍으로 오가던 트윗은 이집트의 안과 바깥을 연결한 소중한 통로였다. 트위터 해쉬 태그(#egypt, #jan25, #tahrir)를 통한 이집트 바깥의 지지와 여론 형성 또한 다른 차원에서 이집트 민주화 운동을 지원한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이집트 당국이 인터넷을 끊은 후에도 트위터 #Jan25에는 일초에 10개씩 트윗이 올라왔다. 인터넷을 통한 외부 지원자들의 지지와 여론 형성은 또 다른 힘이었다. 위키리크스는 이집트 시위에 맞춰서, 유출된 이집트 대사관 전문을 계속 흘리고 있었다. 트위터, 위키리크스, 블로그, 알자지라, 가디언 등 기성 언론사로 연결되는 흐름이 이집트 외부에서 이집트 국민을 지원하는 큰 힘이 되었다.

모바일폰은 발 달린 카메라다. 그것이 인터넷과 결합되면 실시간으로 현장 영상이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퍼나르기를 통해 복사되어 발 없는 말처럼 돌아다녔다. 조그만 개구멍 하나라도 열려있으면 정보를 통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현장의 시민과 기자와 방송국과 인터넷이 주고받으며 불리는 정보는 거의 시차 없이 세계에 전달된다. 여기에 이집트 민주화 운동이 차지하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 맥클루한(Mcluhan)은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능력을 확장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이 스마트폰(미디어)의 육체를 확장해준다. 발 달린 스마트폰의 탄생. 모바일폰은 말 그대로 움직인다. 인간과 미디어간의 주종관계를 헤아리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이미 지난 2008년 한국의 촛불 시위에서도 나타났다.

 

미국과 한국의 언론

촘스키는 "이집트 시위는 내가 기억하는 것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지역 봉기"라고 데모크라시 나우의 굿맨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미국은 끝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독재자 편을 들면서 게기다가 그것이 무너지면 그때야 180도 입장을 바꾼다." 미국은 끝까지 게긴다는 게 촘스키 평가의 요점이다. 실제로 미국은 이집트 상황 전개에 따라 갈팡질팡하다가 퇴임을 거부한 무바라크 성명에 뒤통수를 맞기도 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아랍권의 시민혁명이 이처럼 뜨겁게 일어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아랍의 민주화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부시처럼 이라크를 침공한 것 외에 미국은 아랍권에서 무엇을 했을까. 이집트는 미국, 이스라엘과 아랍권을 이어주는 완충 역할을 했다. 미국제 최루탄에 이스라엘이 제공한 감시 장비는 미국이집트이스라엘 삼각체제의 모양을 짐작하게 한다. 무바라크는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 이후에는 미국아랍, 이집트이스라엘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올 수 있다. 이 지점이 미국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거꾸로 연쇄적으로 번지는 아랍권 민주화 운동은 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반미 운동과는 다른 맥락에서 2010년대 반미운동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미국과의 관계도 관건이 되겠지만, 문제는 내부적 민주화의 탄탄한 틀이 개별 나라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갖춰질 수 있는가이다. 민중적 차원의 민주화와 실질적 개혁이 뒤따르지 않으면 필리핀처럼 역성혁명적 민주화의 덫에 걸릴 확률도 있다. 새로운 세계정세, 아랍권 민주화, 네트워크와 민주화, 여성과 민주화, 전근대와 근대, 현대의 복합체에 대한 이해, 이집트 혁명의 원인 등 이번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지난 2월 이집트 시민혁명 기간 동안 세계의 관심과 지지가 이집트 해방광장(Tarhir Square)’에 쏠렸으나 한국의 정치계와 방송만은 예외였다. 한국 방송은 어떠했나? 이집트 시위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129일 토요일, 이집트 상황을 뉴스로 확인하려고 KBS 9시 뉴스를 틀었다. 시작하자마자 아직 도착도 안한 삼호 주얼리호 석선장 이송 관련 보도를 10분가량 하고, 이집트 관련 뉴스는 5분도 채 안한다. 국민 한명의 생명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하는 사례를 이제껏 나는 보지 못했다. 공영방송으로서 매우 훌륭한 자세지만 그 내막을 알면 부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언론은 실재가 아니라 자신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헛것을 보여주지만 그들에게는 그게 현실이다. 이집트에서 폭력과 난동과 무질서와 약탈을 보는 자들은 그것을 보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의 믿음과 현실(실재가 아니라)이 유지되고 맘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집트 국영 티브이는 탱크와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시위대는 별로 없다. 한국 티브이는 이집트 시민과 그들의 시위보다는 서둘러 귀국하는 외국인을 보여준다. 그들은 불안을 본다.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나대로 본다. 나는 이집트에서 약탈 대신 투쟁과 시위를 본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다. 나는 희망을 본다.

그런데 "나는 나대로 본다"는 얼핏 주체성 있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상대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언론은 실재와 현실의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언론은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보이는 대로 보거나, 생각대로 본다면 그것은 인터넷 시대의 언론이 될 수 없다. 인터넷 시대의 시위에서는 대중 스스로가 미디어가 된다. 언론은 대중의 눈으로 현실을 볼 때 실재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대중의 눈으로 실재를 보려면 우선 현장 속에 있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언론은 실재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가려내고 종합하면서 실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언론 스스로 새롭게 현실을 만드는 실천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기성 한국 언론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실재 이집트 시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아무런 실천과 개입을 하지 않았다. 현장의 취재도 없고, 인터넷과의 연결을 통한 새로운 전달에 대한 고민도 없고, 애당초 이집트 민주화 따위에는 진지한 관심도 없었던 국내 언론은 엄격히 말해 이 시대의 언론으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방송과 언론뿐만 아니라 정치권 또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군부독재에 대항해서 민주화를 쟁취했던 나라, 촛불시위로 인터넷을 시위와 결합하여 사회운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대한민국에서 이집트 시민들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공식적으로 표명한 정치인이나 단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적어도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1월말 즈음해서 지지 성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지구촌 사회의 민주화를 겪었던 나라의 국격에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이번 이집트 민주화 운동은 여러 가지 생각꺼리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1980년 광주 항쟁과 19876월 항쟁, 그리고 2008년 촛불시위를 거친 우리에게 그것은 머나먼 남의 나라의 때늦은 민주화 운동만은 아니다. 이집트 민주화 운동은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겪었던 정권의 폭력성, 6월 항쟁에서 보았던 시민의 힘, 그리고 촛불시위를 통해 드러났던 인터넷 시대의 시위 문화를 한 데 뒤섞어 놓은 혼합물처럼 보인다. 그것은 저 멀리 아프리카 북단에서 벌어진 남의 나라 이야기로 보기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끝까지 버티는 미국의 행태, 정권의 지연전술, 시민의 저항과 참여, 그리고 치졸한 반혁명전략과 수습방식 등을 숨 가쁘게 쫓으면서 가슴 졸이던 보름간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혁명은 이별의 말도 없이 어느 사이에 우리 곁을 떠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이제부터라도 이집트 민주화 운동의 실재를 알기 위해 좀 더 그곳에 가까이 다가서야 할 것이다

 

2011-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