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액트온

1987 광주구장 대 미스터리

By 2010/08/02 10월 25th, 2016 No Comments
laron

2009년 한국 프로야구는 WBC 준우승으로 시작 해서 최다관중 돌파(592만 명),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끝내기 홈런, 기아의 V10달성 등 풍성하고 즐거운 한 해가 되었다. 올해와는 다르게 프로야구가 ‘망했어요’를 외치며 침체에 빠진 해는 언제일까? 이는 연도별 평균관중을 보면 어림잡을 수 있는데, 2000년부터 2004년까지 300만 명이 안되는 관중동원를 해서 프로야구의 침체기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흥행에 완전 망해버린 경기는 어떤 경기일까? 다음은 프로야구 역대 최소 관중 순위이다KBO 2009 Record Book http://www.koreabaseball.com/generation/e_book/pdf_down.asp?down_url=2010record_book_pdf.


<역대 최소 관중 순위>

위 자료를 보면 야구와 관련된 여러 흔적들을 읽을 수 있다. 사직구장 69명이라는 뭔가 화끈하면서도 민망한 기록을 보면 부산을 구도(球都)라 부르는 것, 롯데야구팬이 세계 최고라고 흥청거리는 것에 갸웃해진다. 전주 쌍방울 레이더스의 눈물나는 관중동원 숫자는 모(母) 기업의 문제와 성적부진 등 총체적 부실을 가늠하게 하며, V10의 명가 해태-기아의 2000년 최소관중 기록을 보면 모 기업의 부도와 추락하는 성적이 광주 야구팬의 민심을 얼마나 냉랭하게 만들었는지 짐작케 한다.

그런데, 위의 순위에서 1987년이 이상하다.  다른 최소 관중 순위는 시즌 막바지인 9월 말에서 10월에 작성된 것에 비해 시즌 중반인 7월 광주구장에서 세 경기나 최소 관중 순위에 들어있다. 즉, 해태는 당시 못나가는 팀이 아니었으며, 전년도 한국시리즈 우승자라는 프리미엄까지 있는 팀이기에 위의 최소관중 순위결과는 지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순위에서 1987년 해태 타이거즈와 관련된 자료를 추려보자.

6위. 1987.07.02. 광주구장 132명
13위. 1987.07.03. 광주구장 186명
15위. 1987.07.01. 광주구장 195명
그리고 19위 역시 광주구장이다. 19위. 1987.06.30. 광주구장 213명.

헐… 1987년 6월 30일, 7월 1일, 2일, 3일. 이 4일 동안 해태에는, 광주에는, 대한민국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1987년 6월 30일
노태우는 오전에 전대갈을 방문 전일 발표한 시국수습방안(6.29선언)관련 담화를 나누었다. 국제올릭픽위원회(IOC)가 노태우의 6.29선언이 88올림픽 개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익한 조치라고 환영했다. 마린피츠워터 미 백악관 대변인은 노태우의 직선제 개헌 등 8개 건의안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고 전진적인 제안"이라 평했다. 29일 프로야구 경기에서 OB가 삼성을 상대로 9:1의 승리를 거두어 30승을 찍고 전기리그 2위 확정, 페넌트레이스 직행 티켓을 거미쥔다. 1위 삼성, 2위 OB가 확정. 해태 26승 2무 23패. 30일 롯데를 상태로 3:0 승. 승리투수 문희승(완봉)

1987년 7월 1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선언을 전대갈이 적극 수용하며 특별담화를 통해 국민대화합을 제창했다. 민주당 헌법개정안작성특위는 7월 1일 아침에 4년 중임 대통령 임기를 핵심으로 하는 당개한안을 논의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미국 하원에서는 노태우의 6.29 선언을 만장일치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종합주가지수는 사상최고치를 경신(!), 전일보다 7.66포인트가 오른 411.76을 기록했다(오오 민주화 오오…). 프로야구 관련해서 1987년 6월 30일 당시 1위 삼성, 2위 OB, 3위 해태, 4위 롯테였다.  7월 1일 해태 26승 2무 24패. 청보 핀토스 상대로 3:5 패. 승리투수 임호균(완투)

1987년 7월 2일
노태우랑 기명사미가 전격 회동을 가진다. 5•18광주민주화운동(당시 표현 : 광주 사태)의 관계자와 핵심적인 책임자로 규정되었던 김대중씨의 사면복권이 추진된다. 통일민주당창당대회방해폭력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정치깡패 김용남(속칭 용팔이)에 대해 치안본부가 전담요원 40명을 배치, 본격 수사에 들어간다 해태가 재일동포투수 김성길의 삼성팀 이적과 관련 선수등록자격 적법성여부를 두고 KBO에 이의를 제기했다. 김성길 선수는 일본 한큐 소속이었는데 이 한큐와 해태는 자매구단이었는데 김성길이 해태와의 트레이드를 거부, 임의탈퇴선수로 공시되었다가 삼성에 간 것. KBO는 선수계약동의서를 양도협정서로 간주해온 것이 관례(그놈의 관례!)라며 절차상 하자가 없다고 밝힌다. 7월 2일 해태 26승 2무 25패, 빙그레를 상대로 5:3 패. 승리투수 이상군(완투), 이상군은 7월 2일 당시 다승공동 2위, 11승 모두 완투승(!!!)

1987년 7월 3일
민정당이 광주사태희상재위령탑건립을 제의했으나 5•18광주의거청년동지회 및 유족회대표, 부상자회는 이를 거부한다. 김영삼, 김대중 각각 기자간담회를 열고 6.29선언의 의미와 향후 정국구상을 밝힌다. 6월 수출 총계는 41억불이고 1인당 GNP는 세계 32위인 2,150달러, 연평균 성장률은 6.6%를 기록한다. 유명우는 6차 방어전을 국내에서 치르기로 하였고, 101회 윔블던테니스 8강에 미국의 나브라틸로바가 안착했다. 씨름판은 현대중공업의 이만기와 럭키금성 이봉걸의 양강구도에 삼익가구의 큰곰 홍현욱이 가세해 3파전 양상을 보인다. 프로야구 전기리그 종료. 해태 27승 2무 25패 전기리그 4위. 빙그레를 상대로 4:2 승. 승리투수 신동수. 전기리그 삼성 우승 33승 0무 21패, 승률 0.611(ㅎㄷㄷ)

‘야구장을 찾지 않을 정도로 광주시민이 들불처럼 일어났다’라는 해석이 과장된 것이라면 ‘야구구장이 시즌 중반에 텅 빌 정도의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라는 정도의 해석은 받아들일만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광주에 일어난 그 어떤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1987년 7월 1일, 2일, 3일은 6.29의 여파가 한반도에 격렬히 몰아쳐 6월의 격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정국으로 진입하는 초입이라 할 수 있다. 대갈마왕은 6.29를 수용했고, 정권의 가장 더럽고 추악한 과거를 덮어두고자 5•18민주화운동 관련 당사자들에게 구애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이래저래 뒤져보아도 1987년 7월 광주구장의 최소관중과 상관관계를 발견 할 만한 중대한 사안이 발견되지 않는다. 언론통제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광주지역과 관련한 특별한 뉴스도 찾을 수 없었다. 7•8•9 노동자 대투쟁 또한 그 촉발을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조합 창립으로 본다면 87년 7월 광주구장의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단서로 보기는 힘들다. 그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만한 해석이라면 ‘6.29선언, 김대중의 사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전두환 정권의 억지 화해 무드 등이 광주지역에 야구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제공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야기 하고 나누기 위해서 잠시 야구장을 외면했다’정도가 될 것이다. 정황상 무난히 받아들이고 싶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진실은 아닐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잘나가는 팀의 시즌중반 경기를 제치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은 스컬리와 멀더에게 조사를 요구한 다음 후대 역사가들의 심판에 맡기는 바… 까지는 아니고 좌우지간 궁금하다.

이렇게 보강 해 보자.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뉘어져 운영되던 당시 프로야구에서 지난해 우승팀인 해태가 전기리그 2위 안착에 실패, 페넌트레이스 직행 티켓을 못 잡고 4위로 지지부진 한 것을 바탕으로, 정치적 국면이 숨가쁘게 바뀌는 와중에 높은 정치의식과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던 광주시민들이 야구는 후기리그에 맡기고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한 고민들을 나누는데 집중했다고 말이다. 이 해석의 장점은 시즌 막바지에 별볼일 없는 팀(2002년의 롯데)의 홈 경기에서 관중들이 포풍처럼 빠져나간다는 일반론에 포섭되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1987년 6월 30일부터 4일간 일의 광주구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6월 30일 OB가 2위 확정을 하면서 프로야구에 대한 열기는 한풀 꺾이게 되고 ,격동의 87년 한 가운데에서 야구는 정치보다 덜 재미있는 스포츠가 되어버렸다. 6월 30일부터 4일간 광주구장을 지킨 연인원 700명은 무엇을 하며 살고있을까? 격동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3S정책의 노예라는 비판에 아랑곳 않고 광주구장을 지키고 있던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후, 아름답게도 해태 타이거즈는 후기리그 28승 3무 23패 2위를 기록, 전기리그 2위인 OB와 플레이오프에서 3승 2패의 혈투를 치르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해태는 전•후기리그를 통합 우승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4승 무패, 한국야구 역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2연패, 최초의 선발타자 전원 안타(!!!)를 기록하며 우승으로 광주시민들의 야구사랑에 대답했다. MVP는 4경기 12타수 6안타(2홈런) 4타점의 외야수 김준환.

 

 

문화연대 체육문화위원회 뉴스레터 『돌려차기』 10호에 실린 글입니다.

2010-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