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

[민중의소리] ‘양쯔강 노인들도 갖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안보 때문에 못 없앤다?

By 2014/02/2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신훈민
snunecro@gmail.com
진보네트워크센터

[기고] ‘양쯔강 노인들도 갖고 있는’ 주민등록번호, 안보 때문에 못 없앤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7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대신해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대안이 없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을 전후하여 정부가 다양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2009년 이후 금융사. 기업, 공공기관을 통해서 1억 9283만 건의 개인정보유출이 발생했음에도 해킹이나 개인의 일탈 등으로 취급하고 유야무야 정보유출 사태를 처리했던 정부가 태도 변화를 보인 것은 환영할 일이다. 특히 주민등록번호 제도 개선을 꾸준히 요구해온 정보인권단체로서 대통령이 주민등록번호 개선을 언급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주민등록번호를 대체하는 다른 식별수단을 도입하려는 시도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전 국민 아이핀 번호, 핸드폰 번호 유출 일어날 수도

대통령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부의 대안은 유출된 주민등록번호와 연계되는 대체수단을 도입하겠다는 과거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 대체수단의 하나로 2006년에 도입된 아이핀은 아이핀 발급업체인 본인확인기관이 매개된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주민등록번호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민등록번호와 큰 차이가 없다. 본인확인기관을시 ‘국가의 늘어난 팔’이라고 본다면 국가 주도의 일률적 주민등록번호 부여와 집중 관리의 구도는 크게 달리지지 않는다.

이동통신사를 통한 휴대폰 본인 인증도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아이핀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아이핀, 휴대폰 번호 등 또 다른 식별번호가 주민등록번호를 대체할 뿐이라면, 이번에는 전 국민 아이핀, 전 국민 휴대폰 번호 유출 사태를 불러올 뿐이다.

정부안이 아직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은 상태이지만, 정부는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를 유지한 채 그에 연결하여 임의번호를 도입하는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앞서 언급한 과거 대체수단들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한 정책이다.

정부의 대안은 이미 전 세계에 뿌려진 주민등록번호 문제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근본 원인은 그대로 둔 채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의 ‘대증요법’에 그칠 뿐이다.

‘주민등록번호=통합적 개인식별번호’ 이제는 폐지해야

현행 주민등록번호는 개인의 다양한 정보를 상호 연결하는 ‘연결자(node)’로서 기능한다. 즉 주민등록번호는 개인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만능열쇠(master key)’이다. 과거 동독에서 우리나라와 유사한 주민등록번호가 사용되었지만, “개인을 감시하려는 수단”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 모두 폐지되었다.

완벽한 보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능열쇠 역할을 할 수 있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통합적인 개인식별번호가 존재하는 이상 내외부의 유출 시도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만능 식별번호도 더 이상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 통합적인 개인식별번호 체계를 폐지하고 복지, 의료, 연금 등의 목적에 따른 번호체계로 대체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는 주민 서비스라는 고유 목적에만 한정해야 한다. 국가가 시민에게 번호를 부여할 수는 없다는 것이 원칙이어야 한다. 다만, 의료, 육아, 연금 등의 제도를 통해 시민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예외적이고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목적별 번호제가 사용되어야 한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옥션 유출 사고가 있었던 2008년 이미 한국 정부에 주민등록번호를 공공서비스를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만 수집·이용하도록 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국가안보 때문에 주민등록번호 필요하다는 것은 억지

국민이 변화를 요구할 때마다,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 할 때마다, 자유를 외칠 때마다, 정부는 국가안보를 운운하며 국민을 겁박했다. 지금도 몇몇 소위 안보전문가들이 국가안보를 운운하며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전 세계로 유출되어 ‘양쯔강에 사는 노인들도 하나씩 가지고 있다’는 현행 주민등록번호를 기반으로 국가 행정을 운영하는 것이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보를 분산하고 사용 목적을 제한해 정보유출 시 자유롭게 변경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정부가 시도 때도 없이 말하는 국가 안보를 위하는 길이다.

국가안보를 운운하는 목적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을 겁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정부와 소위 안보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여야 한다.

‘사회적 혼란만’ 운운 말고 정부가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적극 나서야

주민등록번호 변경으로 인해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변경으로 인한 혼란이 클지, 변경하지 않고 놓아둠으로써 국민들이 평생 겪게 될 정신적·물질적 피해가 클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번 정보유출 사태로 인해 고작 한 달 동안 카드 재발급 하면서 든 비용만 500억원이다. 이것은 사회적 혼란이나 국민들이 입은 정신적·시간적 손해 등은 포함하지도 않은 금액이다. 그리고 추가 유출 여부는 확인조차 할 수 없다. 추가 유출로 인한 2차, 3차 피해 혹은 이에 따른 불안감으로 국민들이 평생 지불해야 할 비용 또한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정부가 추진한 도로명주소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2013년 도로명주소법의 위헌을 다투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전문가들은 물론 여당에서조차 도로명주소 전면 재검토 등의 논의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서도 정부는 도로명주소 도입을 위해서 4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였고, 앞으로도 2800억원이 넘는 예산이 더 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 불만과 전문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꿋꿋하다. 정부가 고민하는 사회적 혼란이나 비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지난 10년간 24만여명 정도가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했지만 사회적 혼란은 없었다. 이름을 변경한 뒤의 후속절차나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한 뒤의 후속절차나 큰 차이가 없다. 10년간 이름을 바꾼 경우가 120만여명이다. 요즘도 한해에 16만여명 정도 이름을 바꾸고 있다. 이름을 바꾼 후 관련 문서를 일일이 수정해야 하는데, 지금 국민 개개인이 혼자서 처리해도 사회적 혼란은 없었다.

정부는 주민등록번호 변경 후 후속 작업을 일괄 대리한 경험이 있다. 2008년 정부에서 주민등록부와 가족관계등록부 상의 생년월일 불일치를 해결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정부는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하는 국민들을 지원하고 사회적 혼란을 완화하기 위해 운전면허증, 금융자료, 자동차등록부, 초중고대 학적부, 사업자등록증, 국가자격증, 건축물대장, 토지대장 등을 일괄 대행처리 했다.

금번 정보유출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진행한다면, 변경으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혼란이 개인정보의 만능열쇠 역할을 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어 국민들이 평생 겪을 직간접적 고통보다 크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주민등록번호변경을 허용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정부와 국회, 전문가와 시민사회의 지적 경청해야

금번 정보유출 사태나 현행 주민등록번호 체계를 해결할 책임이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시대적이며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체계가 유지되는 것에는 국회도 큰 책임이 있다.

2011년 SK컴즈에서 3,50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을 때, 주민등록번호를 변경하려는 소송이 있었다. 현재 헌법소원이 진행 중에 있다. 사법부의 최종 판단은 나오지 않았으나, 하급 법원은 “주민등록번호변경(우리가 요구하는 체제 변화를 포함하여)은 주민등록번호체계의 효율성, 폐해 및 그 보완책,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비용, 주민등록번호 유출에 따른 개인의 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결정하여야 할 입법재량의 문제”로 보았다.

즉, 현행 주민등록번호체계를 방치하고 있는 국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현재 사태로 정부가 집중 공격을 받고 있으나, 국회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주민등록번호의 문제점에 대해서 너무 많은 전문가들이 오래 전부터 지적을 하였다. 하지만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움직여 주민등록번호를 변경 혹은 폐지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꼭 필요하다. 그 동안 수없이 발생한 주민등록번호 유출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전적으로 시민들의 분노 때문이다. 이러한 분노를 속으로 삼키거나 전문가나 정치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선거 때만 잠시 정치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치인과 정책결정자들에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 거리에 나설 수도 있고,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도 있다. 그리고 소송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현재 경실련, 참여연대, 진보넷 등의 홈페이지에서 주민등록번호 변경 청구인단을 모집하고 있다. 짧은 시간을 투자해서 소송에 참여함으로써 주민등록번호 변경이라는 역사적인 과정에 함께 할 수 있다.

국민들이 언제나 받아들여야만 하는 제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한 제도인지의 판단은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는 제도의 타당성을 시민 대다수를 설득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을 뿐이다. 최후의 법정은 입법부도 행정부도 사법부도 아닌 전체로서의 유권자인 국민이다.

다시는 국민 대다수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국민,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신훈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변호사)

*민중의소리에 기고한 글 입니다. (http://www.vop.co.kr/A00000725865.html)

2014-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