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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개인정보유출과 ‘정보’인권

By 2015/01/12 5월 3rd, 2018 No Comments

작년 초에 실무수습 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꽤나 인기 있는 곳에서 실무수습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이력서에 본인의 신장·체중·취미·특기·종교, 가족의 출신학교·직업·근무처·직위를 쓰라고 한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토론이 벌어졌다. ‘왜 이런 정보를 요구하는 것이냐’, ‘원래 그렇다. 초보처럼 굴지 말아라’, ‘취직 처음하냐’ 등등 다양한 의견이 오갔다. 며칠 고민했다. ‘직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것이 옳은가. 관행적으로 해 왔던 일이니 그냥 수긍해야 하는 것일까’ 접수 마감일 쯤,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렸다.

부모님 대학도 쓰라고 한다면서요. 우리 어머니는 초졸이십니다. 제가 나이가 많은 건 아닌데, 그리고 늦둥이도 아닌데 초졸이십니다. 삼촌 대학 보내시겠다고 여자들은 일만 했다네요. 새삼스레 여기 적을만큼 희귀한 일도 아니죠. 저 키우시는데 최선을 다하셨고, 열심히 사셨죠.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못 배운 한이 있지만 저한테 결코 대학이나 학벌 등을 강요하지도 않으셨고요. 그냥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믿고 응원해주셨죠 … 어머니 대학을 묻는 일자리가 나온다면 전 초졸이라고 쓸 겁니다. 제가 어머니의 결단이자, 얼굴이죠. 왜 묻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시대에 좋은 대학 나온 사람 얼마나 되려구요. 초졸이라 쓸 겁니다. 부끄럽지도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그걸 보고 혹시라도 우리 어머니에 대해 조그마한 편견이라도 갖게 될 사람들 때문에 역겹네요.

그 사람은 이런 곳에는 지원하지 않겠다며 글을 마쳤다. 나도 작성한 이력서를 삭제하고 이곳을 상대로 민원을 제기했다. ‘직무능력과 관련 없는 개인정보를 요구하지 말라. 개인의 신체적 특징과 종교적 신념을 알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부모의 능력에 따른 차별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출신학교·직업·근무처·직위까지 요구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한 달 후 이력서 변경을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고, 올해 이력서에서 문제 삼았던 부분은 모두 삭제되었다.

이곳은 ‘모두가 훈훈한 새지평의 법률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이다. 변호사 실무수습자를 모집하면서 불필요한 개인정보를 요구한 것이다. 국민의 인권보호에 가장 민감해야 할 법률구조공단조차 개인정보 수집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었다.

이곳이 끝이 아니었다. 변호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지방변호사협회에 등록해야 한다. 등록 준비를 하며 서류를 살폈다. ‘별첨’이라고 되어 있으나, “상세히 기재” 하라고 안내되어 있는 ‘현황자료’에는 ‘본인의 신장·체중·혈액·종교·재산(동산, 부동산, 가옥(자가, 타가)), 가족의 직업 등’을 기재하게 되어 있다. 주변 변호사들에게 ‘이 부분을 어떻게 작성했냐’고 물으니 ’왜? 그냥 작성했지‘ 라고 답한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둥글게 살고 싶다. 하지만 부당한 개인정보 수집이다. (지금은 신장·체중·혈액·종교·재산(동산, 부동산, 가옥(자가, 타가)) 정보를 수집하지 않고 있다.)

최소한의 개인정보만 적고 등록서류를 제출했다. 지방변호사회 직원이 잠시 고민하더니 ‘가족관계’만 써달라고 한다. 부모님이 궁금한 것일까? 아내와 6개월 된 아들의 이름과 생일만 적었다. 거부했어야 했는데, 소심했다. 법조인들이 중심인 법률구조공단이나 각 지방변호사회조차 관행적으로 불필요한 개인정보를 요구한다. 다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답안지 작성하듯이 빈칸을 채워나간다.

2014년 벽두부터 카드3사에서 1억건에 달하는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하지 않았냐”고 발언했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개인정보를 다 적지 않으면 금융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 현실을 모르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경제부총리의 발언은 서민들과는 달리 저 높은 곳에 사시는 분의 전형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한국의 잘못된 개인정보 수집 관행과 엉망인 보안시스템으로 인한 개인정보 유출은 구조적인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이 ‘개인정보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책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기업을 여전히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1억건이 넘는 개인정보 유출사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거나 과거 있었던 정보유출사태 때마다 내어놓았던 대책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은 개인 식별 수단이 필요하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해외 진출을 외치는 기업들이, 외국에서는 쓰지도 않는 주민번호에 의존해서만 장사를 할 수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정부와 기업을 믿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은 개인정보를 다루면서 여전히 ‘효율성’을 앞세우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한 각종 토론회에서 유일한 반론이 ‘효율성’이다. 그러나 이 ‘효율성’은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터졌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오로지 국민이다. 스스로 챙겨야 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기재할 때마다, 하나하나 따져 묻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효율성’과 ‘안전’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 한국 사회가 아직도 ‘효율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사회인지를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사고가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정보화 사회에서는 정보가 돈이고 권력이기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은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한다. 다만, 한국은 조금 특수한 상황이다. 주민번호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을 신뢰할 수 없으니 개인이 자기 정보를 챙겨야 하지만, 이미 유출된 정보, 특히 주민번호는 반드시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주민번호를 ‘만능열쇠’라고 부른다. 거의 모든 개인정보가 주민번호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1991년 주민등록전산망이 가동되었다. 가동을 앞두고 공공기관의 정보화 촉진과 정보화 관련 정책 개발 및 지원을 주업무로 하는 한국전산원(현)한국정보사회진흥원)은, ‘개별적으로 개발된 여러 정보시스템을 종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문제가 심각해진다. 같은 자료라 하더라도 개인에 관한 자료가 분야별로 서로 다른 여러 책자에 수록되어 여러 부서에 분산되어 있는 경우 이를 한 곳에 소집하여 종합하는 작업은 사실상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있는 경우 개인의 주민번호만 입력하면 분산 수용되어 있는 각 데이터베이스에서 부터 개인의 자료가 순식간에 한곳으로 모이게 된다. 이것이 전산화된 기록이 갖고 있는 프라이버시 보호상의 문제이다.’라는 우려를 담은 보고서를 발간했다. 공공분야, 민간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된 주민번호는 정보화 사회와 맞물려 모든 개인정보를 연결하는 ‘만능열쇠’가 되었다. 게다가 주민번호는 변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개인정보를 변경하더라도 추가 유출이 발생한다면 주민번호를 매개하여 유출된 정보들이 재구성된다. 개인정보 불법유통업자와 해커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해주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주민번호가 중심에 놓인 개인정보 연결망을 끊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자기정보에 대한 결정권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91년 주민번호가 전산화된 후 2014년까지 1차 유출만 4억건이 넘는다. 2차, 3차, 4차 유출을 합치면 얼마나 유출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계속된 개인정보 유출사태에 주민번호는 항상 포함되어 있다. 전 세계에 유출되어 회수가 불가능한 현재 주민번호를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된다.

개인정보 유출사태 이후 국회에서 주민번호 체계 개편을 위한 토론회가 수차례 열렸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주민번호 체계 개편에 반대하지 않는다. 토론회는 항상 화기애애하다. 반대하는 토론자를 구하기가 힘들다. 어렵게 섭외한 정부 관계자도 검토 중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주민번호 체계 개편 방향은 크게 4가지이다.

첫째, 개인의 생년월일·성별·출생지역이 포함되지 않은, 아무런 의미 없는 임의의 숫자로 바꿔야 한다. 주민번호에 기본적인 개인정보를 담은 것은 주민번호 생성시 중복을 막기 위해서이다. 행정망이 전산화되기 이전에는 기발급된 주민번호와 중복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정보를 바탕으로 한 주민번호를 구성은 나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우려는 없다.

둘째, 주민번호가 유출된 경우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 당연한 요구이다. 왜냐하면 주민번호는 개인의 번호이기 때문이다. 공사익의 균형을 위하여 아무 때나 변경할 수는 없겠지만, 주민번호가 유출된 경우에는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 정보 주체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이다.

셋째, 공공분야에서 주민번호의 사용처를 한정하고 목적별 번호제를 도입해야 한다. 지금처럼 주민번호가 다양한 곳에 쓰인다면, 무작위 숫자로 새로운 주민번호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재유출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주민번호는 주민등록사무 등에 한정하여 사용하고, 조세, 연금, 의료분야별로 목적별 번호를 사용해야 한다.

넷째, 민간분야에서는 주민번호 사용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 고객 관리나 채권추심은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다. 그 동안 기업은 주민번호를 사용하면서 거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고 개인정보유출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부담했다.

주민번호체계 개편 방향과 개편 후 사회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기 위한 토론회를 진행하면서, 많은 전문가들은 주민번호 체계 개편은 ‘한국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주민번호로 상징되는 국가가 통제하는 단일 번호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개인이 개인정보의 통제권을 회복하는 길이고 이는 제1세대 인권인 자유권 회복을 첫걸음이다. 제2세대 인권인 사회권과 제3세대 인권인 연대권을 논의하는 상황에서 제1세대 인권인 자유권의 회복이라니. 이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사생활과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것은 자유권의 시발점이며 다른 모든 권리의 기초이다. 국가권력과 사적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영역을 보호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밑바탕이다.

by 훈민
※ 이 글은 실천문학 2014년 여름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