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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성과 디지털 기술

By 2013/11/07 10월 25th, 2016 No Comments

 통치성과 디지털 기술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지난 7월 11일, 디엔에이법(디엔에이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대한 헌법재판의 공개변론이 있었다. 디엔에이법은 강호순 사건 등 강력범죄에 대한 여론이 비등한 시점에 중범죄자 재범 방지 명목으로 2010년 제정되었다. 그런데 제정 과정에서 이 법의 적용 대상이 널리 확대되었다. 철거와 정리해고에 맞서 저항하다 큰 참사를 겪은 용산 철거민과 쌍용 노동자에 대해서도 DNA 채취가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한진중공업에서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씨에 대해 채취 요구가 있었다. 점거 등의 방식으로 사회 모순에 격렬히 저항해 온 이들에 대한 DNA 채취 요구가 계속되는 것이다. 진보넷과 민변 등 인권단체들은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2011년 헌법소원을 제기하였고, 공개변론과 같은 위헌 심사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그런데 헌법 재판에서 디엔에이법의 문제점을 입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과학 논쟁의 문제가 있다. 수사기관-과학자 연합은 DNA 신원확인정보는 오로지 숫자와 부호의 나열에 불과한 개인식별정보일 뿐 다른 개인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DNA 신원확인정보는 DNA의 비코드화 영역인 인트론 부분에 속하는데, 이 영역은 개인을 식별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부분 외에는 정크(junk) 영역으로서, 민감하다고 볼 수 있는 유전적 특질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DNA 데이터베이스 역시 2005년 이미 합헌 결정이 내려진 지문 데이터베이스와 기본권 침해 측면에서 크게 다른 점이 없으니 합헌이라는 것이다.
 
이에 헌법소원 청구인 측은 검·경이 DNA 신원확인정보를 취득하기 위해 채취, 감식하는 소위 정크 DNA에도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는 수많은 부위가 있다고 반박하였다. DNA 신원확인정보 그 자체만으로도 남녀, 가족관계, 다운증후군 여부와 같은 정보를 직접적으로 얻을 수 있고, 어느 정도 민족적 차이도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디엔에이법에 대한 재판은 과학적 쟁점에서 양측의 주장이 맞서고 있다. 그러나 상대방인 수사기관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과학자 연합의 지원을 받는데 비해, 청구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주장을 한국 사회에서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법 제정 시점부터 수사기관과 협력해온 법의학자들은 이 법이 수사기법에 어떤 이점을 가져올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입증해 왔다. 예컨대 2009년 정부 공청회에서 이숭덕 교수(서울의대 법의학교실)는 "만약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유전자형이 미리 갖추어져 있다면, 해당 범죄가 이러한 사람들과 연관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어 범죄 해결에 도움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2011년 공저 논문에서는 "범죄자의 친족들이 범죄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DNA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부모 형제 또는 삼촌 조카와 같이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수사에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인권단체는 유전자로 범죄자형을 규정하고 예측하는 것이 위험한 신인종주의이며 더구나 그것을 가족으로 확대하는 것은 새로운 연좌제나 다름이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과학자 사회에서는 인적, 학술적으로 이런 문제의식을 입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반면 수사기관-과학자 연합은 화려하고 다양한 논변을 함께 구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DNA의 잠재성이 수사상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 기대하는 논문을 생산해 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디엔에이법의 오남용이 충분히 통제되고 있고 가족검색과 같이 첨예한 제도는 아직 시행하고 있지 않으니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재판을 방어한다.
 
가장 큰 어려움은 이 제도가 기원하고 있는 법적 발상 그 자체에 있다. 대다수 정보인권 이슈는 DNA 데이터베이스 뿐 아니라 감청, CCTV, 지문, 인터넷 실명제에 이르기까지 형사정책과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엄벌주의가 강화되는 현실 속에서 형사정책에 맞서 인권을 주장하는 것이 쉽지 않다. 특히 제도를 떠받치는 힘이 시민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신자유주의적 경찰력의 강화와 ‘뉴빅브라더’형 감시 국가는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도래해 왔다. 시민들은 더 이상 사회국가가 아닌 국가와 연합하여 ‘쓰레기 인간’, 즉 소비력이 없고 시민들의 일상 생활을 위협하는 난민, 이주민, 그리고 범죄자들을 감시하고 시민 사회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다(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이때 이들의 발언력은 자기 자신의 권리에서 나온다. 시민들은 자신의 안전권이나 재산권을 주장하고, 때로는 이런 권리를 위해 자기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를 스스로 유보한다. 그러니 시민들의 어떤 권리와 경쟁하는 처지에서 정보인권의 입지가 좁을 수 밖에 없다. 주민들이 CCTV 설치를 환영하는데 정보인권 단체가 인권침해를 주장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런 한계는 오늘의 통치성 그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다.
 
1978~1979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푸코는 역사적으로 공법-인권-자유의 개념에서 두 가지 길이 있어왔음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는 연역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천부인권이 있다고 보고 그것을 법권리로서 주권자의 통치성을 제한하는 국가이성으로 받아들였던 프랑스적 길이다. 다른 한 가지는 법권리가 아니라 통치실천의 유용성 차원에서 법률과 자유가 시장에서의 교환을 공리적으로 충족하는지에 주목하는 영국적 길이다. 전자가 의지로서의 법률에 주목한다면, 후자는 법률을 합의의 결과로 본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소유권 등 대부분의 ‘권리’ 개념이 주로 후자의 체계 속에 포괄된다는 것이다. 유용성이 전통적인 법권리를 포괄하는 시대가 19세기 이래로 도래했다. 공권력과 시장, 이 두 가지 체계는 이제 ‘이해관계’ 지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그런데 우리의 인권법 담론 또한 후자의 개념에서 그리 멀리 서 있지 않다. 공공의 이익, 수사의 효율성, 안전권, 재산권, 개인정보의 권리 등 여러 권리들은 유용성의 시장에서 서로 경쟁한다. 심판은 어떤 권리를 우선시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이득이 될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 달렸다. 이런 틀 자체가 우리 시대의 통치성이다. 인권 담론이 유용성의 경기장 안에서 서로 경쟁하는 동안 국가 자신은 최소 통치를 내세우고 사법 제도도 그 한계에서 작동한다.
 
디지털은 이런 통치성에 딱 부합한 기술이다. 우선 디지털 기술은 정확하고 중립적이다. 따라서 문제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책임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CCTV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디지털 기술은 비가시적이다. 작업 반장이 쫓아다니며 인적으로 감시하던 시스템을 대체한 작업장 CCTV는 지금 보는지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리 없이 녹화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줌, 회전, 음성 녹음, 야간 투시를 비롯한 첨단 기능으로 대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완벽하게 노출시킨다. 딴 짓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규율 정치의 완벽한 재현이다.
 
이제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행위를 ‘채증’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고 ‘예측’하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다. 최근 빅데이터 기술은 자동화된 의사결정을 목표로 한다. 일찌기 DNA 데이터베이스의 명분도 재범을 ‘예측’하고 ‘방지’하겠다는 데 있지 않았던가. 백화점 입구의 CCTV에 포착된 어떤 방문객의 피부색, 옷차림, 걸음걸이, 과거 방문기록으로부터 구매력이 있는지, 문제는 없는지를 실시간으로 판단하고, 쇼핑 공간에서 그를 분리시키거나 아니면 특정한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전략을 세운다. 이런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과 정보를 이용한 통치가 신체에 각인되어 우리의 삶, 생명 그 자체, 그리고 인구 전체를 관리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어디서 올 수 있을까. 법 담론이 공공의 이익, 시민의 권리, 범죄자의 ‘이해관계’ 사이에 어정쩡하게 머물고 있는 한, 디지털 기술을 상대하는 정보인권도 그 한계 내에서 맴돌 수 밖에 없다. 푸코식으로 보자면, 유용성의 법 담론이라는 에피스테메 그 자체에서 벗어나야 정보인권의 해법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푸코는 철거민과 노동자의 인권 그 자체의 연역적 권위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법 담론이 시민의 권리 이름으로 철거민과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배제하고 법권리를 박탈하는 한계를 돌파해야만 할 과제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이 법의 일부 오류를 시정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다른 한계를 불러올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치성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왜 시민의 권리와 범죄자의 권리가 경쟁해야 하는가? 이것을 묻지 않으면 바우만이 말한 바대로 비 시민은 담장 바깥으로 쫓겨나고, 시민들 역시 담장 안 시설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3-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