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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정보화사회와 노동조합'(하종강)

By 2000/04/14 10월 25th, 2016 No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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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 하종강 칼럼에서 퍼왔습니다.

노동교실(HA 2) [28/29]

제목:<노동학교> 제1강 ‘정보화사회와 노동조합’

올린이:자유혼(하종강) 2000.03.26 01:32:42 조회: 54

온라인노동학교 노동조합과정 제 1강

정보화사회와 노동조합

하 종 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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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읽는 글

1. 17세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2. 노예제 사회에도 기계가 있었을까?

3. 기계파괴운동의 숨은 뜻

4. 노동조합의 출발

5. 그래도 특권층 노동자는 존재했다

6.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등장

7. 정보화 사회의 노동자

8. 박사학위 노동자의 출현이 의미하는 것

9. 역사 속에 처음 나타나는 기묘한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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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는 글>

금속노조연맹의 수련회에서 선배를 만났다. 내가 일하는

연구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규모가 큰 연구소의

소장으로 일하는 선배는 내 앞 강의를 맡았는데 일찍 도착한

나는 노조 간부들 틈에 끼어앉아 선배의 강의를 30분쯤

들었다. 선배는 시종일관 ‘노동운동의 위기’를 강조하며

"정말 정신 똑바로 차려야한다."고 다그치면서 강의를

마쳤다.

강의를 마친 선배에게 다가가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니

선배는 내 얼굴을 쳐다보고 말한다.

"자네 요즘 너무 힘 든 거 아니야? 얼굴이 아주 안 좋아."

나는 내심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힘 든 게 사실이지만,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10년 남짓밖에 안 남았어요. 환갑 먹어서도 지금처럼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앞으로 남아 있는 일할 시간이 너무 짧은 거에요.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야지요."

선배가 큰 소리로 대뜸 받았다.

"노동조합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어줘야 10년이지…"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역전노장의 대 선배가 그렇게

단정지을 정도로 지금 우리의 위기가 심각한가…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선배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못 생긴 사람 앞에서는 "못 생겼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 사람에게는 그 말이 진짜 욕이 되니까… 그러나 잘 생긴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못 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 사람이 절대로 못생겨지는 것은

아니니까…

선배가 많은 사람들이 듣는 앞에서 그런 농담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이 정말 ‘농담’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10년

후에도 절대로 물 건너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일찍이 배운, 17-18세기 유럽 메뉴팩쳐 시대의

수공업적 노동자는 ‘장인’이었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지금의 대학교수

급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시의 노동자는 숙련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들이 숙련된 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한 그들의 특권은 보장되는 것이기에 장인들은 숙련된 기

술을 전수하는 데에 인색했다. 각종 복잡한 제도를 거쳐 그 기술을 전수

받는 데에는 거의 평생이 걸리기도 했다.

당시의 식민지 경제가 전세계적으로 상품의 수요를 창출했으나 그 상

품을 생산하는 숙련된 노동자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으니 그들의 특권을

갈수록 강화되었다. 일주일에 4일 정도만 일했고, 점심 시간에 아내가

점심을 싸 오면 점심 먹느라고 두어 시간씩 소비하거나 심지어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파업의 효과가 지속적으로 발휘되고 있었으니, 대자본

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새삼스럽게 단체행동을 결의할 필요도 없었다.

중세의 도시는 급속하게 해체된 농촌의 장원에서 몰려든 해방 농노와

그 가족 등 전체 인구의 70%를 날품팔이 대중이 차지하고 있었고(중세의

도시가 배경인 서양 영화에서 흔히 보듯, 남루한 옷을 걸치고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무리들이 바로 그들이다), 노동자는 그 날품팔이 대중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특권층이었다. 이와 같은 노동자의 특권은 기계가 생산

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파괴되었다.

<노예제 사회에도 기계가 있었을까?>

산업혁명 이전에도 기계는 있었다. 다만, 생산에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었

다. 그리스 시대에 이미 증기기관이 발명되었으나 귀족 정원의 분수 등

오락시설에만 주로 사용되었다. 기계가 생산에 투입되면 귀족의 사유재산

인 노예의 값이 하락할 뿐이었으므로 당연히 귀족들은 기계의 사용을 금

지시켰다.

수력을 이용한 방앗간 기계를 제작한 사람들을 로마 황제가 모두 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기계의 사용은 귀족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일이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세 말에 이르러 자본가와 노동자의 사활을 건 이해관계에 의해 비로소

기계가 생산에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계파괴운동의 숨은 뜻>

수공업적 노동자의 특권을 분쇄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생산에 기계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형의 자동화, 기계화는 19세기에 이르러

섬유산업과 정미산업 등 한 가지의 원료가 공정 첫부분에 투입되어 마지

막 부분에서 완제품이 만들어져 나오는 1종적 생산공정에서 거의 완성태

에 도달했고, 섬유 직조 노동자, 방앗간 노동자들을 쓸모 없는 존재로 만

들었다.

우리가 아는 ‘기계 파괴 운동’은 이에 대한 특권층 노동자의 저항이

었다. 기계를 혐오한 것은 특권층 노동자들이었다. 기계파괴운동에서 망치

를 들고 기계를 때려부순 노동자들은 우리가 막연히 짐작했던 것처럼 헐

벗고 굶주린 노동자 대중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출발>

그와 같은 특권층 노동자들이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노동조합이

었다. 달갑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노동조합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Trade Union’에 땀 흘려 일하는 ‘노동

‘과 관련된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탄생하면서부터

‘보수’ 또는 ‘반동’이라는 또 다른 성격을 그 내부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이 자칫하면 보수적인 집단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갖게

되는 경향은 노동조합의 이러한 숙명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힘이 모아진 노동자 집단이 18세기의 자본가 계급과

마찬가지로 "모이기만 하면 공중을 해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음모를 꾸미는" 수구세력이 될 수도 있다는 시각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는 특히 재벌과 동맹을 이룰 가능성이 있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향방에

주목해야 하는데, 자칫하면 룸펜 프롤레타리아가 반동 세력에게 동원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도 특권층 노동자는 존재했다>

대다수 수공업적 노동자의 특권은 생산에 기계가 투입되면서 분쇄되었으

나 여전히 특권층 노동자는 존재했다. 누구였겠는가? 바로 다름 아닌 ‘기

계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었다. 기계의 수요가 대량으로 요구되었으나 기

계는 여전히 소수의 숙련된 금속 조립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막대

한 수요에 비해 공급은 태부족이었다.

한 장소에서 한 가지 원료로 완제품까지 뽑아내는 섬유산업, 정미산업

등과는 달리, 수천 개의 부품들이 수십 장소에서 별도로 제작되어 나중에

공장에서 노동집약적으로 조립되는 기계 생산 공정은 19세기 산업혁명

완성 후에도 오랫동안 기계화·자동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숙련 노동자들

은 자본가들의 간섭에 대해 자신들의 숙련된 수공 기술을 무기로 능히 저

항할 수 있었다.

<테일러-포드 시스템(Tayler-Ford System)의 등장>

생각해 보자. 이 고숙련 노동자들의 특권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었

을까.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가 보급되거나, 기계를 생산하는 노동자를

기계처럼 부려먹는 공정이 개발되면 그들의 특권 역시 막을 내릴 것이었

다. 공정이 복잡하여 기계화·자동화할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노동자를 기계처럼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복잡한 부품 생산 및 기계 조립 공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기

계처럼 일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테일러-포드 시스템

(Tayler-Ford System)이었다. 테일러 시스템은 주로 선행적 부품 생산

공정에 투입되었고, 포드 시스템은 완제품 조립 공정에 투입되어 작업을

물 흐르듯이 진행시켰다. 그 생산 공정에 갇힌 노동자는 물결을 감히 거

스를 수 없는 물방울 같은 존재에 불과해졌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우리는 그 존재의 표본을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이 노동자의 특권을 분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격변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결국 50년의 세월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테일러-포드 시스템은 전세계의 모든 공장을 관철했다.

<정보화 사회의 노동자>

우리가 말하는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도 결국은 이러한 변화의 연속선

상에 있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를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지금의 고숙련

노동자들은 누구인가? 석사·박사 학위 노동자, 프로그래머, 영화를 포함

한 멀티미디어 산업 종사자, 언론 노동자, 금융 노동자 등이 그들이다. 정

보화 사회는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대량 수요를 창출하는데, 이

러한 고숙련·고학력 노동자들의 특권은 점차 빠른 속도로 소멸되고 있

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착취당하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를 Pan Opticon

System (‘전감시체제’ 또는 ‘범감시체제’)은 거의 완벽하게 통제한다. 미

국의 실리콘 밸리를 샅샅이 견학하고 온 어느 학생 녀석이 쓴 기행문을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 가 보니, 직원 한 사람당 사무실 한 개씩 사용하

고 있더라."

한없이 자유롭게 일하는 듯 보이나, 빌 게이츠는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에도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하여 미국 본사 말단 사원의 업무까지 철저하

게 통제할 수 있었다지 않은가?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두뇌 노동자이든

육체 노동자이든, 지식 노동자이든 손 노동자이든 글자 그대로 노동 과정

전체가 ‘유리처럼 투명한 공장’이 되는 것이다. 이 ‘유리처럼 투명한 공장

‘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은 농촌의 읍사무소에서부터 대재벌의 빌딩까지

관철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반도체 칩으로 상징되는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기술이 그것을 더욱 가능하게 할 것이다.

<박사학위 노동자의 출현이 의미하는 것>

외국 유수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직원들의 얼굴이 슬로우

컷으로 차례차례 등장하는 어느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가 있었다. ‘그런

훌륭한 인재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우수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소비자들

에게 심어주는 대외적 효과를 노린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우수한 두

뇌들이 자기들의 삶을 그 회사에서 펼치기로 했다면 꽤 괜찮은 기업일 것

‘이라는 자부심을 그룹 내의 모든 직원들에게 심어주는 대내적 효과 역시

상당했을 것이다. 3대 재벌에 속했던 그 그룹은 결국 IMF 국면을 돌파하

지 못한 채 해체되었으니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 광고를 좀 다른 측면에서 보자. 박사 학위를 받은 그들도 분명히 ‘노

동자’이다. "교직은 신성한 것인데, 교사가 어떻게 노동자냐?"고 하면서 ‘

전교조’를 절대로 합법화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대통령 시절 YS

의 발언은 무식의 소치여서 부끄러울 따름이니 그냥 빨리 잊자. 전문직

노동자, 두뇌 노동자, 지식 노동자, 화이트칼라, 소수 특권층 노동자 등 여

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도 자신의 노동력 상품

을 판매한 임금에 의지해 생활하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우선 교육 노동자에 대해 얘기해 보자. ‘신성한 교직’이

라고 불리웠던 교사들을 마치 "빵 공장에서 빵을 생산하는 노동자와 똑

같이 취급하기 시작한" 교육부의 정책에서도 우리는 그 역사적 과정을 보

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가졌던 알량한 특권마저 빠른 속도로 상실하는

이 땅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희망을 보는 것이

다. 금년 7월 1일에야 합법화되었지만 ‘전교조’는 그동안 합법적 지위 여

부와 무관하게 우리 역사 속에서 노동조합으로서의 역할을 얼마나 훌륭하

게 감당해왔던가…

과학기술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의 60% 이상이 석사학위 소지자이

다. 얼마 전 내가 노동조합 창립기념식에 가서 강연을 했던 원자력안전기

술원 노동조합은 전체 조합원의 35%가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지난번 서

울지하철 파업 당시 그 파업에 전면적으로 결합하여 가장 철저하게 동조

파업을 벌였던 노동조합이 바로 이들 과학기술노동조합이었다. 그들은 ‘

특권층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주력군인 것이다.

금융 노동자들을 보자. 한 때의 ‘중산층’은 듣기 좋은 허울이었을 뿐,

그들은 지금 몰락하는 중산층의 대표적 존재이다. 부유한 20%와 가난한

80%의 사회로 양극화되는 우리 사회에서 그들은 부유한 20%에 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겠지만 결국 대부분은 가난한 80%에 속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은행원들은 스스로 이렇게 즐겨 말하곤 한다. "옛날에는 자

식이 은행에 취직하면 시골의 부모님들이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어.

그런데 요즘은 은행원한테는 딸도 안 준대."

언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정리하고 있는데 KBS노동조합

에서 전화가 왔다. 이제는 ‘개혁적 방송법 쟁취’ 따위의 고상한 목표가

아니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 푼 더 받기 위한’ 합법적 파업을 시도해 보

려고 하는데 그 ‘합법적 파업 전술’에 대하여 교육을 해 보자고 한다.

파업일자를 이미 못 박고 시작하는 그 촉박한 일정에 내가 도저히 맞출

수도 없었지만 이제는 방송노조도 사업 작풍을 ‘조직적 대응’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민주노총 교육국장에게 간신히 떠 넘겼다. 방송

노동자, 그들은 절대로 노동조합과 무관한 특권층이 아닌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판·검사들이 파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

만간 판·검사들이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모이는 꼴을 보고야 말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경찰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찰

노조는 심심찮게 시위도 하는데 경찰노조가 시위를 벌이면 그걸 또 경찰

이 진압해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경찰노조는 최근

시위를 벌이며 자크 시락 정부에게 "핵실험에 수백억원의 돈을 쏟아붓지

말고 그 돈으로 공무원의 처우을 개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IMF 체제 도입 이후 "내가 어느 종합병원의 의사요. 그런데, 의사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없습니까?"라는 상담이 가

끔 들어오더니 급기야 몇 개월 전, 경기도의 어느 종합병원에 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의사들이 모두 가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병원의 설득으로 나

중에 의사들은 탈퇴하긴 했지만 우리는 조만간 의사들이 노동조합에 가입

하는 모습을 역시 보고야 말 것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노동조합은 결코 물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이

다. 노동조합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필요성

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처음 나타나는 기묘한 현상>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의 전개 과정과는 달리 최초의 커다란 변화에 직

면했다. 임금 노동자가 이 땅에 출현한 이래, 노동의 고숙련화는 노동자의

특권과 비례했다. 반대로 탈숙련화는 곧 노동자의 탈권력화를 의미했었다.

이 불변의 등식이 최초로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임금 노동자의 출현이래

아직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노동의 숙련도는 높아지면서도 노동자의 권리는 축소되고 권력은 박

탈되고 있는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8년 동안 현장의 단

순 직종에 종사해 온 노동자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취업한

고학력 노동자의 생활이 겉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두뇌 노동과 육체 노동의 대립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이 기묘한 현상

에 직면하여, 우익의 낙관론자들은 노동의 숙련화를 즉각 노동자의 권력

상승으로 등치시킨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노동자의 복지가 향상

되어 고학력 노동자와의 차이가 좁혀지는 것을 중산층이 확대되는 낙관적

과정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한편, 전통 좌익들은 반대로 탈숙련화의 계속적인 심화를 아직도 집요하

게 도출했다. 유럽의 노동조합이 오랫 동안 햇갈려온 것이 바로 이 부분

이라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노동과정도 조만간

탈숙련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생산 과정에 기계가 투입

됨으로 해서 숙련 노동자의 탈숙련화가 초래되었던 것처럼, 정보화 사회

의 고숙련 노동자 역시 새로운 컴퓨터 기술 등에 의해 조만간 탈숙련화

과정을 거칠 것이고 그것은 곧 노동자의 탈권력화를 결과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고숙련을 요구받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

하고 숙련된 노동자의 권력은 숙련도에 비례하여 상승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까지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되풀이된 것과는 다른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기묘한 현상이 바로 새로운 정보화사

회 노동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특권을 상실해 가는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처지가 장래 노동운동 속에서는 오히려 희망이 되는 것

이다. 이 현상에 조응해야만 노동운동은 반동의 늪을 벗어날 수 있을 것

이다. 이야기를 여기서부터 출발시켜 보자.

 

2000-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