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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시문을 날리는 마녀의 손 – 오노요코 회고전

By 2003/11/12 10월 29th, 2016 No Comments

문화

김지희

내가 아는 오노 요코는 존 레논의 부인이었고, 언젠가 TV에서 퍼포먼스하던 장면을 봤던 것 같고, 영국사람들에게 더럽게 욕 많이 먹었겠다라는 것이다. 회고전을 한다길래 도도한 그 인상이 떠올랐는데, 한편으론 너무나도 유명했던 남편 그늘 뒤에 있던 진짜 모습이 궁금해졌다. 언뜻 봐도 겉멋들어 보이는 상류층인 그녀의 전시회, 그러나 결과는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다.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던 그녀, 작품 하나하나가 행동만, 생각만, 과정만, 결과만 해봐도 되는 놀라운 것들이었다. 삶이 심심한 당신 옆에 은근슬쩍 재미있어 보이는 지시문을 한장 날리는 그녀, "너도 해봐, 재미있다"라는 미소를 머금고 손을 내미는 당당하고 따뜻한 그녀, 내가 찾은 그녀는 관람자 옆에 서서 함께 하고, 부담스러워하면 그림자가 되는 그런 사람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집을 지으시오]라는 제목의 작품이 보인다. 사람키가 넘는 아크릴벽 집에는 미로처럼 통로가 나있다. 이런 작품을 보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가서 서성거리고 싶은 생각이 들거다. 그래도 식상하다. 이런 작품, 이미 누군가 해본거 아닌가? 그러다가 작품설명을 봤는데 정말 걸작이다. 그녀가 지시하길, "일몰이 만들어 내는 특별한 프리즘 효과만으로 존재하는 벽으로 이루어진 집"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아, 그렇구나. 이 벽은 빛으로 지어진 벽. 해변가 언덕에 일몰의 빛을 받아 벽이 생기고 반사된 무지개가 보인다면? 상상만 해도 멋진 광경이다.
좀더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 가득 지시문이 붙어있다. 지시문은 말그대로 그녀의 "지시가 적혀있는 글"이다. 제목과 활동내용이 있고, 활동내용은 1. 2. 3. 과 같은 번호를 붙여 해야 할 행동의 순서대로 적어놓았다. 예를 들어 ‘1. 담배불로 종이에 구멍을 내라’, ‘2. 꽃을 심어라’ 등등.. 벽이 끝나갈 쯤에는 그녀가 직접 지시문에 따라 실행한 결과물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해놓았고, 지시문들은 묶어서 두툼하게 책으로 만들어놓았다. 작품이니 복사본이 나올리 없고, 어찌 그리 해리포터의 마법책같아 보이던지… 갖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하시오’라는 지시와 ‘***끝납니다’라고 끝나는 시점까지 지정해버린 문장들 앞에서 "네가 뭔데 이런 걸 시켜?" 라고 버티면 예술의 향유는 끝난다. 그냥 즐긴다고 생각하고 따라하면 그녀가 본 세상을 같이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대단히 훌륭하게도 때와 장소를 가리게도 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순서대로 상상만해도 즐길 수 있다.
1965년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진행됐다던 퍼포먼스 [자르기]의 비디오 촬영본은, 예전에 내가 TV 에서 본 그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감상이라면 서구 자유주의를 향유하는 동양 여자의 만용이랄까? 이런 생각으로 10분정도 지켜봤는데, 완전 쇼크였다. 관객은 돌아가면서 무대에 올라와 앉아있는 그녀의 옷을 가위로 잘랐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움직임이 거의 없었지만, 간혹 가슴이 보일까봐 손을 올리거나 몸을 움추리기도 했다. 이건 만용이 아니라 두려움이고 공포였다. 어디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가위의 습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따라하고 싶지 않고, 슬프며, 동시에 인상이 강렬한 작품이었다.
전시회 끝무렵에 나타난 거대한 체스판의 제목은 [신뢰를 갖고 하시오]. 작품 설명에 적힌 지시문은 정말 걸작이다. ‘1) 자리선택 … 2) 게임진행 3) 당신의 생각을 경기자들에게 전달하려 하시오…’ 자리 선택할땐 높거나 낮은 자리를 구하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20석이나 되는 의자들은 모두 높이가 동일했다. 머리속에 계속 물음표가 스쳐지나가다가 문득 원근감을 떠올렸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의자가 제일 높은 법이다.
거대한 순백색 체스판 10개에 순백색 의자 20개를 바라보며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즈음, 체스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둘다 흰말이네. 이걸로 어떻게 놀지?’ 평화주의자였다하니 적군도 아군도 없는 상태에 대한 해석일수도 있고, 생각으로 구현하는 작품의 완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는 긍정적인 사고의 발현일수도 있다.

그림, 조형, 설치, 영화촬영, 퍼포먼스, 문장등 실로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며 관람자와 함께 하는 작업을 해온 그녀는 매우 자유로워보였으나 언제나 자유를 꿈꾸는 자였던 것 같다. 그럼 결론은 "자유롭지 못한 자"였던 건가? 작품 대부분이 지시적이지만 폭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은 건 바로 관람자에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옆에 앉아서 또는 뒤에 서서 "이거 해봐라, 저거하면 끝난다"라고 했지만, 내가 뭘 느껴야 하는지 정해주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은 비폭력적이며 자유를 희구하는 자의 것이다. 느낌의 강요를 만드는 거대하고 웅장한 작품들 내지는 그런 미술평론들 에서 다소 자유롭다.

2003-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