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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서평{/}[함께 읽는 정보인권] 일베를 폐쇄해야 할까?

By 2018/03/15 4월 3rd, 2018 No Comments

글쓴이│우함시



◈ 혐오표현과 기계적 중립

지난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가까운 친구와 논쟁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른바 메갈리아의 미러링 사태였죠.
나름, 젠더 의식 있다고 자부하던 저였지만 친구와의 논쟁은 당시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미러링은 또다른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적인 관점에서 봐도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다’가 제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팟캐스트 방송에서 #82년생김지영을 주제로 한 차례 더 논쟁을 하며, 이후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아주 조금이지만, 자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기계적 중립이라는 관점으로 보려고 한 것은 아닐까? 맥락이 배제된 논쟁을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성과 여성을 향한 상호 혐오를 같은 관점에서 보는 것, 한편으론 맞고 한편으론 모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비교입니다.
행동, 언어, 가치관 하나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로 구성된 그룹이 있습니다. 돌김에겐 눈엣가시 같은 OO당 의원들이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이들을 향해 “세상에 쓸모 없는 놈들, 모두 의원직 박탈시켜야 해. 아주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해”라고 날선 비난을 한다면 당사자들은 어떨까요?
불쾌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각자의 의견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반대로, ‘범죄도시’나 ‘경찰학교’ 같은 영화를 보고 “조선족들은 믿을 수 없고 위험해, 우리나라에서 모두 추방해야 해”라고 한다면 당사자들은 어떨까요?
두 사례 모두 꽤 수위 높은 비난입니다. 물론 블로그이기 때문에 조금은 순화하긴 했지만요.
혹시 여기에서 어떤 차이를 느끼지 않으셨나요? 이 차이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경우, 당사자인 의원들이 들었을 때 불쾌함을 호소하겠지만, 어떤 실존적 위협을 받진 않습니다. 그들에게 실존적 위협은 검찰에 출두해야 할 상황이 생겼거나, 공천을 받느냐 못받느냐의 기로이거나, 유권자들이 표를 주지 않을 때이겠죠. 개개인의 의사 표명, 날선 비난이 이들의 생존과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막강한 권력과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토대로 적절하게 대응할 수도 있지요. 명예훼손이라는 좋은 법적 보호를 통해서 말이죠.

반면 후자를 우리는 사회적 소수, 약자라고 합니다. 다름과 차이에 대해 인색한 사회일수록 소수자들을 향해 개개인의 성향, 개성, 특징과 상관 없이 편견과 낙인을 찍습니다. 벌써 무슨 소리야? 걔들이 얼마나 험하고 사회에 갖은 해악을 끼치는데? 하고 반발심리가 드실지도 모릅니다만, 모든 조선족이 그렇다라고 인식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불특정 다수의 날선 비난은 그 자체로 약자의 존재 자체를 공격하는 무기로 변합니다. 반면 이들을 구제해줄 법적, 사회적 안전장치는 없습니다. 왜냐? 특정 개인을 지칭한 명예훼손이 성립하지도 않으며, 불특정 다수를 향한 혐오 발언에 대해 법으로 제재할 근거도 없거든요. 한마디로 무방비로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 때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네요. 최근 불붙은 #미투 현상을 봐도 여전히 이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떤 식으로 대했는지,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자명하게 드러나니까요. 여성을 향한 남성의 차별과 편견, 억압은 여성에게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이고 불안요소였습니다.
반면 그에 대항하는 미러링 논쟁을 살펴보면, 불쾌함, 언짢음이 주를 이루었지, 그것 때문에 남성으로서 존재의 위협을 느끼진 않았습니다. 물론 그러니까 미러링이 정당하다, 문제 없다 이건 아닙니다. 그렇게 호도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사회적 ‘맥락’이라는 걸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는 겁니다.

오늘 소개드릴 책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와 지난 번에 소개한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소수자를 향한 혐오스러운 사회의 인식과 그 문제점을 짚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자기의 어떤 숨기고 싶은 부분,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취향, 관심사가 있으신가요?
심각하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치맥을 즐기며,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즐기는데, 그것이 만약 아주 소수만 선호하는 취향이라 존중받지 못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만약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차별받고 공격받는다면요?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요? 그런데 인종, 생김새, 성적 소수자를 향해서는요? 전세계 법 어디에도, 이들을 차별해도 된다, 이들은 비정상이다라고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차이를 차별하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죠. 그 차별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두 책은 소수자, 약자를 향한 사회적 편견을 주목합니다. 한 명은 그것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다른 한 명은 그것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적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지 주목합니다.

◈ 일베는 폐쇄해야 할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요즘 뜨겁습니다. 유시민 작가의 보육정책 청원부터 스피드 스케이팅 팀추월 진상조사 요구까지, 다양한 의견을 볼 수 있는데요. 최근 두 가지 청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일베 사이트 폐쇄 청원과, 조두순 사건 피해자를 희화화해 논란이 된 웹툰 작가를 처벌하라는 청원이었는데요.
각각 20만, 1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원에 공감했습니다.
이번 청원을 보며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가 더이상 혐오를 일삼는 자들을 용인하지 않을 만큼 성숙했구나, 그만큼 인권 감수성이 높아졌구나 하는 점 하나와, 그런데 표현의 자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 하나였습니다.

후자는 욕 먹기 십상인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어디 일베 같은 곳을 두고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느냔 말 나오기 딱이지요. 저도 일베의 도를 넘은 행태에 명백히 반대합니다. 이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를 향해 벌인 행각 하나 하나 뚜렷이 기억하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들을 국가 권력이 나서 규제하는 것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디부터 권력이 개입하게 할 것인가, 문제 되는 사이트를 폐쇄하면 문제의 본질이 사라지는가 등등 말이죠.

홍성수 교수는 혐오표현을 다룬 이 책에서 상당 분량을 ‘표현의 자유’에 할애했습니다. 일베의 망동을 보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던 진보진영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자유를 주장하던 자들이 제재를, 자유를 거부하던 자들이 자유를 외치는 상황입니다.
난무하는 혐오표현마저 표현의 자유 아니냐, 호불호조차 말하지 말란 이야기냐고 항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에서도 정치적 올바름(피시, Political Correctness)를 두고 논쟁이 치열하죠. 여기에서 진보적 법학자의 고민이 역력히 묻어났습니다.

“내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민감하고 삐딱하게 굴어?”

홍성수 교수는 혐오범죄 정의를 세분화하고 그 유형 역시 집요하게 분석합니다. 그에 걸맞은 언어가 주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개념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앤 윌슨 섀프가 쓴 중독사회를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행위를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고 계속 두게 되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상당한 악영향을 행사한다. 그 사물이나 행위에 관한 용어 자체가 없으면, 우리가 그에 직접 대처하거나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매질(때리기)이다. 우리가 매질이라는 용어를 갖게 된 것은 불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매질이라는 행위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에 공동으로 합의된 어떤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는 그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매질하는 사람 혹은 매질의 희생자 등으로 불리지 않았다. 당연히 어떤 통계도 수집되지 못했다. 그 희생자들을 위한 쉼터 같은 것도 세워질리 만무했다. 그 문제를 연구하고 치유하기 위한 기금 같은 것이 마련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그 문제에 이름이 붙고 나서부터는 매질이 우리 사회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개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매질을 당했어요.” 또는 “나는 예전에 매질하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경험을 정확한 이름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그 현실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앤 윌슨 섀프『중독사회』 P.29
홍성수 교수는 혐오표현 문제 해결을 위해 1, 문제 분석 2, 대안 모색 3, 효과성 검증의 순으로 접근합니다.
이제 대안 모색과 효과성 검증을 할 차례입니다. 가장 손 쉽게 쓸 수 있는 카드는 규제입니다. 혐오표현을 법으로 금지하고 위반할 경우 사회적으로 제재하는 방안입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이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민족과 종교, 성적 취향의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법으로 금합니다. 나치가 벌인 인류 최악의 인종 학살에 대한 학습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고민이 생깁니다. 어디부터 혐오표현이지? 어느 선부터 처벌하지? 처벌의 수위는? 범위와 규모, 대상, 전파방식, 일회성인지, 의도성 여부를 고려할 것인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을지 등 고려해야 할 점들이 많고 점점 복잡해집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문제의 원인이나 양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본질적인 고민은 법으로 규제하면 혐오표현이 사라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국가 또는 권력이 제한하는 것의 부작용도 고려해봐야 합니다. 규제는 늘 양날의 칼이 되곤 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도리어 권력에 비판적인 여론에 재갈을 물릴 수도 있습니다. 핀포인트처럼 필요한 곳에만 딱 맞게 작용하는 규제가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Jtbc뉴스화면

두 번째 방식은 미국식 대안입니다. 미국은 수정헌법에 표현의 자유를 명확히 한 나라입니다. 동성애자가 숨지고 장례식을 하는데, 동성애 반대자들이 조롱 섞인 발언을 해도 법적으로 처벌하지 않는 황당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여긴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으로 철저히 구분해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의 발언과 어느 소속, 기관의 구성원으로서 하는 발언을 달리 보는 겁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저것을 자유라고 인정해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관대한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대응(소송, 해고 등)을 합니다. 실제 NBA LA 클리퍼스 구단주였던 도널드 스털링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돼 영구 퇴출됐습니다. 당시 가치액이 6천억 원이 넘는 구단을 소유한 구단주가, 인종차별 발언으로 구단을 강제 매각하고 수십억에 달하는 벌금과 농구계 영구 퇴출 처분을 받았으니, 저로선 놀라울 따름입니다.

미국은 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적극 보장하되, 공공영역의 자율적 규율 마련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도널드 스털링의 사례처럼 법이 아니어도 내부적으로 합의한 규율에 따라 얼마든지 엄격히 혐오표현을 제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업마다, 기관마다 혐오표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내부 규율을 통해 적어도 사회적 혐오는 막겠다는 것인데요. 물론 그렇지 않은 기관, 단체, 기업도 많습니다. 여전히 흑인 혐오, 폭력 문제가 가시지 않는 것을 봐도 그렇고, 정치적 옳바름 PC 논쟁과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봐도 그렇고, 미국 역시 효과적인 대안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는 유럽, 미국식 중 무엇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단순히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제한하고 제재하는 네거티브 방식이 아닌 포지티브 방식의 규제를 주장합니다. 이른바 형성적 규제라는 것인데요.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피해와 구제를 더 명확히 호소할 수 있도록 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늘리는 것을 고민하자는 것이죠. 재일 한국인 혐오 시위대에 맞서 혐오와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 많이 내고자 했던 일본의 시도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죠.
더불어 법으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명문화하되, 처벌과 규제 중심이 아닌 지속적인 교육과 사회 인식을 바꿔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지향하는 바는, 그러니까 궁극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을 검토해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일베 얘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일베를 폐쇄하면 문제는 해결될까요? 또다른 일베가 등장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단호히 약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차별금지법, 지자체별 인권 조례 제정이 되겠지요. 그럼에도 차별하고 혐오한다? 우리는 약자, 피해자의 권리 회복을 위해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위해 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와 교육 현장에서도 지속적이고 단호한 교육이 펼쳐져야 할테구요. 우리의 목적은 결국, 일베라는 돌연변이 제거가 아닌,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토대를 없애는 것이니까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혐오표현금지법이 없어서 문제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 이전에 혐오와 차별의 현실에 대해 무감각한, 그래서 별다른 대책조차 없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혐오표현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 형사범죄화가 적실한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건 사회건 작금의 현실을 충분히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따라서 유의미한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은 것 자체가 문제다. 어디서부터 희망의 대안을 찾아가야 할지 막막하지만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을까? 입법 조치나 법적 대응에 한정하지 말고 전세계에서 고안되고 실천되어온 거의 모든 반혐오표현 대책을 이 책에 모두 망라한 이유도 그래서다. 어떤 것이라도 시작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말이 칼이 될 때』 P.229

 

※ 이 글은 우함시님의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 된 [일베를 폐쇄해야 할까?] 홍성수-말이 칼이 될 때 서평 글입니다.

편집자주 : <함께 읽는 정보인권>은 정보인권 관련 외부 서평글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글의 내용이 진보넷의 입장과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또 다양한 입장과 견해가 섞이며 조금씩 정보인권의 외연이 넓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