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비밀

[기고] 국정원을 부탁해

By 2015/10/15 4월 20th, 2018 No Comments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

뒤늦게 “국정원 앞 냉장고를 부탁해” 영상을 보고 배꼽을 잡았다. 국정원의 해킹 사찰 의혹에 8월 26일 수원촛불처럼 통쾌한 풍자는 없었다. 국가정보기관의 사찰 의혹이 뜨거운 모래 폭풍처럼 지난 여름을 휩쓸었지만, 지나갔다. 국정원이 국회에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가운데 뚜렷한 피해자가 드러나지 않았다며 검찰은 수사를 하는둥 마는둥한다.

흐지부지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찜찜함이 남았다. 확실하게 잡히는 것은 없지만 나도 감시당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함. 우리를 좀먹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가정보기관이 국민 위에 군림할 때 민주주의는 뿌리부터 흔들린다. 국가정보기관은 국가 안보를 위해 활동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예외를 인정받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국민들 앞에 활동의 비밀을 보장받는 것부터가 예외적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는다면 정보기관은 폭주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이해에만 복무하는 정보기관에게는 선출된 국민의 대리자조차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은 대개의 국가들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의거하여 정보기관을 통제해 왔다. 수사권과 정보활동을 분리하고, 국내와 해외 정보기관을 쪼개어 놓았다. 그런데 우리 국정원은 군사독재정권이 출범시킬때부터 이 모든 기능을 한몸에 보유한 만능 정보기관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 정보기관은 한국 현대사에서 끊임없이 정치에 개입하고 선거를 유린해 왔다.

정보기관을 둘러싼 논란에서 빠지지 않았던 것이 도청 사건들이다. 그 가운데 손수 개발한 도청장비로 오랫동안 휴대폰을 도청해온 사실이 발각된 안기부 X파일 사건은 특히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그 이후 통신비밀보호법도, 국가정보원에도 변화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국정원에 대한 민주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디지털 시대가 도래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지난해 특별보고서에서 지적했듯이 디지털 시대는 정보인권에 중대한 위기를 초래했다. 정보기관으로서는,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는” 기계를 저렴하면서도 그 어느때보다 막강하게 갖추게 되었다. 모든 이의, 모든 행동 뿐 아니라, 정보기관들이 오랫동안 숙원하였던 머릿속 생각까지 사찰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탈리아 해킹 사건은 돌발 사고가 아니었다. 국민들 앞에서는 스마트폰을 감청하지 못하고 있다며 감청 의무화를 추진하면서, 뒤로는 국민들 몰래 막대한 세금을 들여 스마트폰을 해킹해 왔다. 본래 그런 국정원이었다. 삼년 전에는 국정원 요원이 “전교조와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은 종북”이라거나 “문죄인ㅋ” “간챨스ㅋㅋ”라는 게시물을 인터넷 유머게시판에 도배하고 있었다. 당시 국정원은 댓글을 단 적이 없다며 거짓말을 했고 나중에는 대북 활동이라고 발뺌을 했었다. ‘불법은 없었다’는 국정원의 셀프 검증을 믿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래 그런 국정원’. 우리 국민은 여기에 만족하고 멈추어야 할까? 마음 속에 불안함을 담고 자기검열하며 살아가야 할까? 불안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카카오톡 대화가 위축되고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위축된다. 시민 행동을 위축시키고 종내는 그에 대한 생각조차 위축시킬 것이다. 그것이 국정원이 우리 사회에 끼치고 있는 가장 큰 해악이다. 피해자는 우리 국민 모두이며 민주주의는 뿌리가 들리우고 있다.

그런데 국정원은 한술더떠 이탈리아 해킹팀 논란을 오랜 숙원을 푸는데 이용할 요량이다. 이제는 합법적으로 스마트폰을 감청하겠다며 감청의무화법 처리를 소리높여 주장하기 시작했다. 지금 국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뻔뻔함이 또 없다.

뻔뻔함에는 웃어주는 것이 약이다. 국가정보기관 앞에 위축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지금의 국민적 과제이다. 내 스마트폰 엿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망명이라도 해서 내 스마트폰과 정보 인권을 지킬 것이라고 저항하는 것이다. 뻔뻔함에 맞서는 국민들의 당당한 태도. 그것이야말로 이 나라 국정원을 부탁할 수 있는 의지처가 아닐까.

* 이 글은 다산인권센터 회원소식지 [몸살] 2015년 7,8,9월 합본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원문 바로 가기 (http://www.rights.or.kr/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