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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

By 2014/12/16 No Comments

 스마트폰 속 비밀 털리는 호구, 당신도?

[프레시안 books] 구본권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 2014.12.12 17:10:03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어느 날, 나는 한 토론회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다. PC통신 회사에서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학부모가, PC통신은 음란의 온상이라며 모든 컴퓨터에서 모뎀을 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PC통신으로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는 데 한창 열렬했던 나는, 무엇이 저분을 저런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을지 궁금했다.
 
상용 접속 서비스가 시작된 날로부터 셈하자면 인터넷은 올해로 스무 살이 된다. PC로부터 모바일로 온라인 접속 환경도 변화해 왔다. 그동안 나 역시 부모가 되었지만, 사이버 공간의 자유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가장 입씨름을 많이 한 상대가 학부모들이었다.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걱정을 낳는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이전에는 인터넷과 PC통신이, 그보다 더 전에는 비디오와 만화책이 학부모들의 우려 대상이었다. 그 두려움은 상당 부분 낯섦, 그리고 몰이해로부터 나온다. 특히 이 나라 학부모들의 미디어 공포는 한 끗 차이로 인생의 당락이 결정되는 입시 전쟁의 공포와 연계되어 있다. 본인이 잘 모르는 미디어가, 한창 공부해야 할 본인의 자녀를 꼬여내지 않을까 의심하는 것이다.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어크로스, 2014년 10월 펴냄)에서 저자 구본권은 부모를 비롯하여 모든 디지털 사용자들에게 ‘디지털 리터러시’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의 편리함 이면에 존재하는 위험(38쪽)에 대해 우리가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이 어떤 편향성을 갖고 있느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211쪽). 오늘날 부모 세대가 디지털 이주민이라면 자녀 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필요한 교육은 ‘금지’가 아닌 ‘제왕학’이다(305쪽). 방대한 정보에 에워싸여 있는 제왕에게 진짜 중요한 정보를 감별해 내는 교육이 필요하였듯,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도 접근 차단이 아니라 정보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내 생각에도 이 시대 시민들에게는 어떤 인터넷 게시물이 실제로는 광고인지, 아니면 국정원 요원이 올린 글인지 감별할 수 있는 식견이 필요하다. 부모가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면 자녀와 소통하거나 관계를 맺는 데도 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사실은 부모 세대가 더 배울 것이 많다는 점이다. 본래부터 리터러시, 특히 미디어 리터러시가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미디어, 주로는 TV와 같은 대중매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미디어의 작동 구조를 이해하고 개입할 수 있는 교육 철학으로서 리터러시가 거론되어 오곤 하였다. 기성세대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행하던 시민 교육의 일환이었다. 물론 지금도 스마트폰 에티켓에 대해서라면 기성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신통한 디지털 미디어에 대해 우리가 익힐 것이 에티켓뿐일까.
 
물론 아이들은 자란다. PC통신에 푹 빠져 자신의 부모를 걱정시켰던 아이들은 이제 부모가 되어 자신이 즐겼던 미디어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 1970∼1980년대 분서갱유의 대상이었던 만화 역시 이제는 훌륭한 학습 미디어로서 부모들을 흡족하게 한다. 여가 시간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부모를 만나는 것 역시 예전만큼 어렵지 않다. 결국 미디어의 도입과 문화적인 수용 사이에 시간적인 격차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디지털 ‘문화 지체'(9쪽)에 주목한다. 
 
프라이버시가 거의 사라진 시대, 저자가 제시하는 ‘디지털 리터러시 10계명’
 
ⓒ어크로스

ⓒ어크로스

 

 

<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는 문화 지체를 줄이기 위하여 ‘새로운 문법을 익혀야 할 때’라는 화두로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제언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10계명’를 제시하며 끝을 맺는다. ‘프라이버시의 종말’, ‘뉴 빅브라더의 진화’,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대주제 속에 담긴 38개의 글들은, 왜 디지털 리터러시가 필요한지에 대하여 촘촘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왜 그렇게 셀카를 찍어대는지, 스팸 메일은 왜 줄어들지 않는지, 왜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우리의 말투가 그렇게 무례한지.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에 대해 당신이 궁금할 법한 사회현상을 대다수 망라하고 있다. 페이스북과 같이 널리 사용되는 모바일 플랫폼의 여러 가지 설정값과 그것으로 인한 소동들, 사회적인 영향력에 대해 저자는 박학다식하고 날렵한 필체로 다룬다. 

 
저자가 제안하는 디지털 리터러시 10계명은 다음과 같다. △기기가 당신을 조종하지 못하게 하라 △디폴트 세팅을 ‘나만의 설정’으로 바꿔라 △가능한 한 자주 ‘방해 금지 모드’를 활용하라 △수시로 이메일, 알림을 삭제하고 청소하라 △뇌가 휴식할 시간을 제공하라 △올리기 전 프라이버시를 먼저 점검하라 △소셜네트워크의 분칠에 현혹되지 마라 △스마트폰과 동침하지 마라 △스스로를 구글링해보라 △’모바일 신언서판’이 새 에티켓이다. 과거 사회생활을 위해 외모, 말, 글, 판단력을 다듬게 했다는 신언서판처럼, 스마트 기기의 부작용과 의존성(15쪽)으로부터 현명한 사용자가 되기 위해 모바일 신언서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특히 흥미롭게 본 부분은 저자가 디지털 기술에 대해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인터넷은 다소 자율적이다. 자율적으로 프라이버시의 종말을 가져온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기 일쑤여서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와 설계자라 하더라도 디지털 시대에 프라이버시를 지켜내기 어렵다(25쪽). 정부 수장이 보유한 권력과 기술로도 정보 추적을 따돌리려는 노력에 한계가 있다(54쪽). 하지만 정보화 도구를 외면하고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은 거의 없으니, 디지털 세상에서 빅브라더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은 없어 보인다. 역사상 처음으로 프라이버시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71쪽). 
 
아주 최근에 유엔도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대해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나비 필레이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지난 6월 ‘디지털 시대 프라이버시권’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는 인터넷, 모바일 스마트폰, 와이파이 가능 단말기와 같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국가와 기업의 감시 능력을 유례없이 확장시켰다고 우려하였다. 십여 년 전에는 국가가 도청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을 다 듣고 분석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뛰어난 검색과 프로파일링 기술이 있지 않은가. 이 시대 감시자들은 역사상 가장 탐욕스럽다. 누구에 대한 것이건 정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예전에 비해 비용도 많이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저인망식으로 인터넷 회선에서 통째로 정보를 쓸어오는 ‘대량 감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인권 대표에 이어 10월에는 벤 에머슨 유엔 대테러·인권 특별보고관이 "각국의 대량 감시 프로그램이 온라인 프라이버시를 실질적으로 완전히 말살해버렸다"고 다소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가져오는 프라이버시의 종말 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디지털 리터러시의 입문 과정이다. 내가 오늘 무심코 올리는 ‘ㅋㅋㅋ’가 미래의 누군가에게 나의 사상이나 정치적 견해, 취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파악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이 기술이 발휘하는 감시의 정치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현명한 사용'(15쪽)뿐일까. 
 
기술의 정치성에 주목해야…11번째 계명 "인터넷 기술엔 참여가 필요하다"
 
우리는 기술의 정치성(206쪽)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다소 해묵은 논쟁이라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의 디지털 감시 세상에 여전히 유효한 통찰이다. 기술의 정치라면 랭던 위너의 고찰을 빼놓을 수 없다. 모제스 시장의 설계에 따라 뉴욕 존스비치 공원 진입로에 놓인 고가도로는 흑인이 이용하는 버스의 통행을 막았다. 원자력 발전은 권위적인 사회를 요구했다. 사이버 공간에도 공간의 정치가 있다. 저자가 지적하는 ‘디폴트 세팅의 함정'(99쪽)이 그것이다. 기업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디폴트 세팅을 경쟁 사업자 견제와 소비자 현혹 마케팅, 즉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이용한다. 사용자들은 마치 도시처럼 설계되고 구획된 사이버 공간 속에서 부유한다. 
 
기술이 상품일 뿐이라면 우리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다. 현명한 소비자가 되기 위해 인터넷 서비스에 가입할 때 개인 정보 제공에 "동의"할지 말지를 고심하는가? 그래도 결국 당신은 ‘동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용하지 않거나, 동의하거나. 그리고 그것이 당신에게 필수적인 서비스일수록, 당신의 인적 네트워크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서비스를 사용할수록, 동의 외에 당신에게 남은 선택은 없다.
 
그러나 기술이 정치라면, 우리에게 반격의 기회도 있지 않을까. 빅데이터 보유 기업이나 기관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사용자들은 거대 기업의 조작 대상으로 전락할 따름(200쪽)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통제’이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거론한 대로 인터넷은 단순 예측이 아니라 사용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영향을 받는 기술(14쪽)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인터넷의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인터넷 역시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거대 플랫폼으로 구획되었지만, 그래도 한쪽 구석에는 어느 정도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국정원 댓글 요원 사건도 한 유머 사이트 운영자의 백업이 없었으면 입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선거운동 혐의가 인정되기에는 부족했지만). 인터넷은 권력의 대량 감시에 취약하지만 추악한 권력을 폭로하는 위키리크스도 존재하고 있다. 인터넷의 가장 위대한 점은 쌍방향 미디어라는 점이다. 남녀노소, 갑남을녀, 필부필부가 다 자기 표현 매체를 보유하게 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10월 카카오톡 사이버 망명 사태가 일었을 때 한 기자분이 나에게 물었다. 압수수색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수백만 명의 평범한 사람들이 왜 망명을 하는 것 같으냐고. 그래서 스마트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은 천부인권이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 권리가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그간 일부분이었다. 권력에 반대하는 생각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를 거쳐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이 손바닥만 한 기계에 누구나 자기만의 방을 갖게 되었다. 그 방은 무척 유연해서 아주 은밀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계로도 열린다. 유튜브에서 ‘강남 스타일’ 뮤직비디오에 대해 글로벌 네티즌들과 함께 댓글을 달 수도 있고, 몇 명과 ‘단톡방’을 열어서 자신의 의견을 토로할 수도 있고, 아무도 모르게 ‘갠톡’을 보낼 수도 있다. 스마트폰은 표현 매체이자 사생활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모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감시 기술은 모든 사람의 모든 기록을 대상으로 하고, 그만큼 감시가 모든 사람에게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과 검찰이 인터넷 허위 사실을 실시간 모니터하겠다고 나섰으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상 전 국민이 잠재적인 망명자였던 것이다.
 
지난 8일 카카오톡은 비밀 채팅 모드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사이버 망명 논란 직후 메시지 보관 기간을 줄인 데 이어, 공개적으로 모든 이용자들에게 적용되는 주목할 만한 기술적 변화이다. 인터넷 기술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설계에 사용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만큼 구현된다(159쪽). 그래서 사용자가 사적 영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320쪽)는 저자의 지적이 중요하다.
 
유엔은 위 보고서에서 우리의 정치·경제·사회적 삶이 기술 플랫폼에 점점 더 의존하는데, 그 플랫폼이 대량 감시에 취약하고 심지어 이를 촉진한다는 사실에 대해 고민한다. 국가 권력이 민간 기업을 협조자로 동원하는 최근의 경향 때문에 더 걱정스럽다. 누가 감시를 말릴 수 있을 것인가? 독일 총리가 자신을 도청한 미국 정보기관에 불같이 화를 낸 후에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국제 정치이다. 우리는 감시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우리는 지금 우리를 둘러싼 감시의 현실과 위험성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이제 문제를 풀어야 할 때이다. 그것은 유엔이 권고한 대로 정보기관의 전자 감시를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제3의 독립 감독 기관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인터넷 기술에 대한 의사결정에 시민사회를 비롯한 다양한 당사자들이 참여하도록 보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인터넷 규제뿐 아니라 감시를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민주주의 문제이고, 대중 정치의 문제이다. 
 
리터러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신기술에 적응하는 방법론에 그친다면 우리는 질서를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에 개입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과 정당한 절차를 배우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대중매체에 대한 미디어 리터러시에서 강조해 왔던 시민 의식 교육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인터넷 매체에 대해서도 그런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인터넷 기술에는 우리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디지털 리터러시의 열한 번째 계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프레시안에 2014. 12. 12. 기고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2329

201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