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와 노동인권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지난 2월 19일, 인천경찰청은 관내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약 1,000명의 주민등록번호 등 상세한 개인정보를 인천시에 요구했다. 경찰이 가지고 있는 명단은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경찰은 비리 제보를 받았다는 얘기 뿐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았다. 1,000명 모두 수사 중이라는 말이었다. 장애인들과 활동보조인들은 경악했다. 왜 우리 모두가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할까? 사회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제공한다는 이유로 공공기관이 보유한 우리 정보가 이렇게 손쉽게 경찰에 넘어갈 수 있구나. 
 
인천 경찰은 왜 그랬을까? 비리를 운운했으나 구체적인 사건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활동보조인 노동조합이 막 인천에서 기지개를 켜던 시점이었다. 결국 경찰이 실제로 제공받으려고 한 것은 수사 자료가 아니라 명단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나라다. 경찰이 감시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무엇이건 제한 없이 다 볼 수 있다. 그나저나 공무원 신분도 아닌 1,000 명의 이런저런 정보를 보건복지부 등 국가기관이 보유한 경위는 무엇일까? 어디서 어떻게 수집한 것들일까?
 
생각해 보면 활동보조인들 뿐만이 아니다. 사회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은 대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2011년 요양보호사들은, 부정수급이 의심된다며 재가서비스 때마다 지문인식을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요양보호사들이 반발하자 휴대전화 위치추적에 동의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보육교사들은 어떤가. 어린이집에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하자 모든 보육교사들이 잠재적인 학대자로 의심 받았다. 일거수 일투족 보육과정이 CCTV에 녹화되고 인터넷에 중계되었다. 사회서비스를 공적으로 감독하는 방식이 감시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수혜자들이 장애인, 노인, 영유아와 같은 사회적 약자라서 감시 옹호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이들 분야 노동자들이 직업윤리를 충분히 지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사회 돌봄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감시 밖에 없는 것일까. 보라. 고된 돌봄 노동이지만 처우는 형편이 없으며 고용은 불안정하다. 노동조합은 요원하다. 떳떳하면 별일 없을테니 감시를 감내하라는 말도 있지만, 이건 참 이상하다. 아무 잘못 없는 이들에게 왜 사람을 쥐어짜는 고통을 감당하도록 강요한단 말인가. 우리가 떳떳하기 위해서, 언제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일하는 시간 동안의 모든 동선을 추적당하고 촬영당하고 심지어 일하는 영상이 인터넷에 배포되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인권은 어디에 설 수 있는가?
 
(소제목)
 
장애인과 활동보조인 1천 명의 정보를 요구한 경찰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연초부터 카드사에서 1억 건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고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카드사 저리 가게 개인정보를 먹는 하마가 바로 경찰이다. 특히 현행 개인정보보호법에서 공공기관이 보유한 개인정보를 영장이나 당사자 동의 없이 경찰에 제공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제18조 제2항 제7호) 이런 관행은 널리 이루어지고 있다. 평소라면 적법절차에 따라 수사해야 할 경찰이, 특별한 죄가 없는 이들의 개인정보를 별다른 근거 없이 싸그리 훑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찰은 시민들 위에 감시자로 우뚝 선다.
 
우리는 이런 형태의 국가를 경찰 국가라고 부른다. 생각해 보면, 신자유주의와 경찰 국가는 참 기묘한 결합이다.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국가가 유독 경찰력을 비대하게 키운다는 점에서 모순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우선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시민 노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경찰력이 강화된다는 설명이 있다. 20:80 사회에서 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가 노골적이 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국가이기를 포기한 신자유주의 국가가 그나마 유지하는 국가기능이 사회안전 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노동자 시민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의사결정은 국경 밖의 지구적 자본이 내리고, 국경 안의 국가는 경찰력에만 집착한다. 특히 여기에는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고 경찰력의 힘으로 비시민을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감금하는 두 국민 전략이 개입된다. 가난을 엄벌하기 위한 형사처벌 강화정책이 이렇게 확산되어 왔다. 또, ‘신자유’라는 이념에 본래부터 경찰국가가 내포되어 있다는 통찰도 있다. 신자유주의가 고전 자유주의와 가장 다른 점은 보이지 않는 손을 방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선조들은 사회주의에 맞서 시장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에 거슬리는 환경을 법과 질서의 힘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경찰력이 비대해질 수 밖에 없다. 확실한 사실은 요즘 사회 정책마다 경찰이 끼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학교 폭력과 같은 교육 문제도 경찰력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오늘날 경찰 국가의 운영에 컴퓨터로 정리된 개인정보의 수집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전자 감시는 필연적이다. 아무래도 첨단 유비쿼터스 사회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신원을 파악하고 동향을 추적하는 것 역시 전자적으로, 원격으로,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보자. 집회시위에 누가 참가했는지 알고 싶은가? 고단하게 일일히 쫓아다니거나 검문하는 것은 옛날 식이다(집회시위 자체를 봉쇄하거나 진압하는 것은 여전히 옛날식으로 해야겠지만). 이제는 CCTV가 경찰을 대신하여 화면에 잡히는 이들의 얼굴을 자동으로 파악할 수 있다. 휴대전화 기지국은 근처에서 신호가 잡히는 전화번호를 쓸어담아 경찰에 제공한다. 
 
물론 이런 절차가 자동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꽤 있다. 집회시위 현장에서 거세게 저항하고 사라진 누군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치자. 카메라로 채증하거나 CCTV로 촬영한 그이의 얼굴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이의 이름을 알려면 이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함께 알고 있는 다른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과 같은 신분증 데이터베이스 말이다. 집회시위 현장에서 010-123-4567 이라는 휴대전화번호를 발견했더라도 이 번호 임자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역시 그 번호와 임자를 함께 알고 있는 다른 데이터베이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보통은 민간회사인 통신사의 데이터베이스들 말이다.
 
경찰에게는 다행히, 한국에는 주민번호가 있다. 세계 어느 독재 국가라도 탐낼 편리한 식별수단이다. 공공과 민간이 보유하고 있는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는 가지각색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주민번호를 기준자로 삼고 있다. 그래서 주민번호만 알면 어떤 사람에 대한 것이건 줄줄이 개인정보를 입수하기 쉬운 세상이다. 경찰은 물론 거의 모든 개인정보를 손쉽게 입수해 왔다. 통신 이용자의 아이디, 이름, 주민번호, 주소를 아는 데 영장이 필요 없다. 법원의 허가 없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공기관 데이터베이스를 열어 주민번호를 보는 데도 영장은 필요 없다. 그리고 이 주민번호를 토대로 또다른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들을 열어볼 수 있다.
 
그래서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참 좋은 시절이다. 검찰총장 아들로 추정되는 이에 대해 알고 싶으면 구청에 전화 한통, 학교에 전화 한통 넣는 것으로 신원조회를 끝낼 수 있다. 인터넷 본인확인제가 시행되는 동안에는 민간 데이터베이스도 이들 것이었다. 다음 아고라에 촛불 시위를 가자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올린 사람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파악하는 데 역시 영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네이트와 싸이월드에서 3천 5백만 명의 주민번호가 인터넷에 유출되고 나서도 경찰과 국정원은 인터넷 본인확인제 폐지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소제목)
 
요즘엔 전자 미행이 유행이다. 경찰이 휴대전화 위치정보를 요구할 때는 범죄 혐의가 있는 어떤 사람이 과거에 어디 있었는지를 알기 위한 경우만이 아니다. 누군가가 앞으로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을 때도 이동통신 회사에 연락한다. 010-123-4567 전화번호를 쓰는 휴대전화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10분 단위로, 때로는 1분 단위로 이동통신사가 수사관에게 문자로 쏘아준다. "종로1가" "광화문" "정동빌딩 민주노총 사옥" 이런 식으로. 몇 달 동안이나. 과거에는 사람이 미행했지만 이제는 내 휴대전화가 나 자신을 미행하는 식이다. 하도 남용되다보니 법원의 허가를 받도록 했지만 형식적으로 전락했다. 희망버스 때도 철도노조 파업 때도 벌어졌던 일이다. 당사자 뿐 아니라 아내, 아들, 온 가족의 휴대전화가 몇달씩 추적당했다. 파업하는 노동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집회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분 단위로 미행당해도 되는 것인가.
 
경찰 국가에서는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제일 타겟이다. 몇 년 전부터 성범죄자들의 재범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운영 중인 DNA 데이터베이스가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가 농성 경력이 있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되지 않아서 용산 철거민과 쌍용 노동자들도 DNA를 채취당했다. 몇달 전에는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채취를 요구받았다. DNA는 지문과 달리 가족이 공유하는 정보이다. 당사자가 사망한 뒤에도 대대손손 그 가족들의 DNA 정보를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이다. 
 
갈수록 생존권 문제가 심각해지는 시대이다. 감시 문제는 그에 비해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주시한다는 사실은, 기분이 나빠도 참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시의 목적이 그냥 바라보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감시는 재미로 개인정보를 추적하고 수집하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대상자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위축시키기 위해, 때로는 배제하기 위해, 때로는 억압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고에 당황스러워 했고 분노했다. 그리고 이렇게 유출된 개인정보가 스팸으로 돌아와 나를 귀챦게 하거나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기 피해로 이어질지 몰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피해는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왜 금융재벌들이 내 개인정보를 자기들끼리 공유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그것은 물론 그들이 나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모은 정보들이었다. 나 모르게 내 신용등급을 A니 B니 매기고 그 정보를 공유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말이다. 그들만의 정보 공유로 우리는 카드 한도액부터 각종 금융서비스 제공에서 그렇게 차별을 받아 온 것이다.
 
그래서 감시에 반대하는 것은 단순히 기분이 좋아지기 위한 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이 나 모르게 내 개인정보를 토대로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의사결정을 내리는 시대인 것이다. 그 어떤 이들은 때로 컴퓨터이고, 그 컴퓨터를 고용한 자본가이기도 하다. 내 개인정보가 내 사회적 삶의 한계를 정하는 격이다. 그래서 감시에 저항하는 일은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내 존엄을 찾는 길일 수 밖에 없다. 반감시는 사회적 권리, 노동 인권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같이 요구해야 하는 주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2014. 3. 18. 불안정노동철폐연대 기관지 127호(2014-03) 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4-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