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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우리는 인터넷에서 자유를 발견했다{/}한국의 인터넷 거버넌스

By 2020/05/19 5월 21st, 2020 No Comments

편집자주 : 한때 인터넷에서는 무한하게 자유로울 것이라 기대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저절로 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이용자를 비롯한 시민들은 국가, 기업 등 권력자를 상대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합니다. 디지털 환경이 고도화할수록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을 누리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터넷 도입 전후로부터 시작된 디지털 검열과 감시의 역사, 그리고 시민의 저항 속에 변화해온 제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하였습니다. 제보와 잘못된 정보는 이메일 della 골뱅이 jinbo.net 로 알려 주십시오.

 

한국의 인터넷 거버넌스

해외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한국의 다른 공공정책 영역과 달리, 한국의 주소자원 거버넌스는 민간, 특히 학술 및 기술 커뮤니티로부터 시작되었다.  국내 인터넷의 도입이 학술 전산망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터넷은 1982년 전자기술연구소(KIET)와 서울대학교 사이에 최초로 TCP/IP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시작되었다. 80년대에는 SDN 운영센터에서 네트워크간 조정을 담당하였으며, 1991년 국내 최초의 거버넌스 기구인 ‘학술전산망협의회(ANC)’가 만들어졌다. 이는 상용 인터넷 서비스의 개시와 맞물려 1994년 ‘한국전산망협의회(KNC)’로 이어졌다.

주소자원의 관리를 위한 망정보센터(KRNIC)는 1993년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담당하다가, 이후 한국전산원으로 이전 되었으며, 1999년 재단법인 ‘한국인터넷정보센터’로 독립을 하였다. 이 당시는 국제적으로도 ICANN이 설립되고, 국내적으로는 인터넷의 대중화에 따라 인터넷 주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거버넌스 기구로 ‘인터넷주소위원회(Number & Name Committee, NNC)’가 만들어졌다. NNC는 산하에 도메인 네임 정책 수립을 위한 네임위원회(Name Committee) 및 IP 주소 관련 문제를 담당하는 프로토콜 및 주소위원회(Protocol & Address Committee)를 두었다. 이 당시에 NNC가 조직 구성이나 운영 원칙에 ‘멀티스테이크홀더 모델’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구성에 있어서 더 이상 기술계나 업계 중심이 아니라, 학계, 법률 전문가나 시민사회 등 그 구성원을 다양화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한국의 주소자원 거버넌스는 2004년 <인터넷주소자원에관한법률>이 제정되면서, 민간 중심의 거버넌스에서 국가 주도의 거버넌스 체제로 변화하게 되었다. 당시 정보통신부는 NNC의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법률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법률은 ‘인터넷주소자원의 개발과 이용촉진 및 관리에 관한 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할 권한을 당시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에 부여하였고, ‘인터넷주소자원에 관한 정책 등을 심의’하기 위해 ‘인터넷주소정책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원회)를 두도록 하였다. 심의위원회 위원은 정보통신부 장관이 위촉 혹은 지명하였다. 비영리 재단법인인 KRNIC은 공공기관인 한국인터넷진흥원(NIDA)으로 재편되었으며, 이후 조직 통폐합을 거쳐 2016년 현재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의 인터넷주소센터에서 KRNIC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즉, 자발적인 참여 중심의 거버넌스 기구인 NNC가 하향식(Top-Down)의 자문기구로 대체된 것이다. 이로써 주소자원 거버넌스에서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와 활동은 한동안 공백 상태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인 인터넷 거버넌스 공간에서 한국 이해관계자의 참여 위축으로 이어졌다.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되어, 2009년부터 과거 NNC에 참여했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다시 주소자원 거버넌스 기구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2009년 ‘인터넷발전협의회’ 내의 ‘인터넷주소정책포럼’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조직되었으며, 이후 2012년 ‘한국인터넷거버넌스협의회(KIGA)’ 산하 주소인프라분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기구의 구성은 하향식(Top-down)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정부 관료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새로운 조직이 만들어지고 소멸되었다.

‘한국 인터넷거버넌스협의회’는 2013년 말 이후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는데 , 이에 2014년 중반부터는 기존과 같은 하향식 조직이 아니라, 상향식(Bottom-Up)으로 새롭게 거버넌스 기구를 조직하자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마침 2014년 4월 브라질에서 개최된 <인터넷 거버넌스의 미래에 대한 세계 멀티스테이크홀더 회의(일명 넷문디알 회의)> 가 개최되었는데, 이 행사는 CGI.br이 주관하였다. CGI.br은 정부, 시민사회, 업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브라질의 거버넌스 기구였는데, 넷문디알 회의를 계기로 국가적 차원의 멀티스테이크홀더 거버넌스 모델로 CGI.br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넷문디알 회의 참가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멀티스테이크홀더 거버넌스 기구’ 설립 논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당시 미래창조과학부 담당자도 이러한 문제 의식에 일정하게 공감하였다. 이후 2014년 말 11월 ‘다자간인터넷거버넌스협의회(KIGA)’ 첫 운영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고, 주소자원 거버넌스를 위해 KIGA 산하의 ‘주소자원 분과’가 만들어졌다. KIGA 운영위원회는 정부가 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공공기관, 업계, 학계, 시민사회, 기술계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그룹에서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기존과 다른 실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현재 KIGA의 위상도 안정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KIGA는 아무런 법적 근거나 재정적 기반이 없다. 사무국 역할도 여전히 KISA 인터넷 주소센터에 의존하고 있다. KIGA가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거버넌스 기구가 되기 위해서는 법적 근거 및 재정적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인터넷 거버넌스’에 대한 정부의 전략과 지원이 부족하고, 민간의 참여자들과 협치하겠다는 인식이 자리 잡지 않는 한, 한국의 인터넷 거버넌스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