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

주민번호 변경, 아직도 갈길이 남았다

By 2017/06/02 No Comments

주민등록번호 변경제도가 5월 30일부터 시행된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들이 일제히 제도 홍보에 나섰다. 만감이 교차한다.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가능해진 것은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과 인권시민단체들의 오랜 요구에 헌법재판소가 응답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제도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국민 통제를 위해 도입한 제도이다. 의무적 국가신분증, 국민식별번호, 지문날인제도 등 이 제도의 요소 하나하나가 인권침해였다. 국가 감시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비판도 오래 누적되어 왔다. 그러다 이 제도들이 정보화와 만났을 때 모순이 두드러지면서 불만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1998년 야당 정권교체를 앞두고 전자주민증에 대해 반대 여론이 형성된 것에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 국가가 이 신분증으로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라는 의심이었다. 국가감시라는 오래된 의제와 첨단기술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고, 국민의 불안을 한낱 음모론으로 치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감시는 근대국가의 속성이고 정보화가 그것을 더욱 고도화할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이었을 뿐더러, 최근 점점더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1968년 12자리, 1975년 13자리로 도입된 주민등록번호 또한 인터넷 환경의 등장 속에서 국민적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여성·인권단체들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주장했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등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추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책이었다.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들로서는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주민등록번호가 평생동안 인터넷에서 팔려다닐 상황에서, 이 번호를 변경하지 않고서는 피해를 면할 방법이 없었다.

정부는 변경 요구를 외면해 왔다. 국가번호를 바꾸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화가 고도화되고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서비스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이 번호에 대한 탐욕과 대량 유출이 급증해 갔다. 거의 전국민에 달하는 국가번호가 전세계 인터넷에 유출되어 있는 상황을 일컬어 어느 학자는 ‘국가안보’에 위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국가가 방어하고자 한 사회적 혼란은 무엇이었을까?

정부는 한술 더 떴다. 어느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터넷 실명제를 강요하면서 기업들이 국민의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게끔 독려했다. 이에 대해 2012년 헌법재판소가 결국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비판한 바가 있다. 인터넷 실명제가 익명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고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국가번호가 세계적으로 유출되게끔 한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에서 정부의 주요 주장 중에는 수사에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모든 국민이 민증을 까고 인터넷을 쓰게끔 해야 추적하기가 용이하다는 발상이었다. 결국 국가의 수사편의를 위해 국민의 정보인권을 모르쇠해온 것이다.

2008년 옥션에서 1천8백만 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자 유출피해자들이 정부에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정부가 거부한 가운데 또다시 2011년 네이트·싸이월드 등 SK컴즈에서 3천6백만 건, 2014년 롯데·농협·국민카드에서 무려 1억 4백만 건이 유출되었다. 인권시민단체들은 피해자들과 함께 변경소송을 제기하였고 2015년 12월 마침내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주민등록번호가 다른 개인정보와 연계되어 각종 광고 마케팅에 이용되고 사기, 보이스피싱 등의 범죄에 악용되는 등 해악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주민등록번호 유출 또는 오·남용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피해 등에 대해 아무런 고려 없이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일률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이다.”는 것이었다.

신성시되어 온 국가번호에 정보인권의 이름으로 균열이 갔다. 이런 역사가 만들어진 것은 이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쌓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정부가 마지못해 시행하는 주민등록번호 변경 제도는 여러 한계가 있다.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엄밀하게 입증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번호 자체에 있다. 현재의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 성별 등 주요 개인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주민등록번호를 쓸때마다 때로는 민감할 수 있는 개인정보가 유출될 뿐 아니라, 이 정보를 토대로 국민을 줄세운다. 나이는 몇 살인지, 어린지 늙었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외모가 남성다운지 여성다운지, 성소수자인지.

반백년 만에 변화를 맞게된 주민등록번호는 이제 이런 인권침해도 해소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국회는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주민등록법을 개정하면서 생년월일, 성별은 바꿔줄 수 없다는 정부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미 전세계에 유출된 13자리 중에 7자리를 그대로 놔두기로 한 것이다. 번호를 바꾸어서 피해를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무색해졌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주민등록번호를 국민을 위한 국가행정에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다른 국가행정은 주민등록번호가 아니라 목적별로 번호를 써야 한다.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임의번호로 주민번호를 바꾸어야 함은 물론이다. 주민등록번호가 맞아야 하는 미래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길에 나선다. 지금까지 역사를 만들어 왔듯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원하는 분들은 공익소송에 지원하세요. 다시한번 헌법재판에 도전해 봅시다. 다만 현행 법률에 따라 소송이 가능한 분은 △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등 여성폭력 피해자이거나 △유출된 주민등록번호로 인하여 생명·신체·재산상 피해를 입었거나 입을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진보네트워크센터 02-774-4551)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입니다)

* 이글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평화와인권> 2017년 5~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