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등록번호

(사)한국성폭력상담소 소식지 {/}임의번호를 구하라

By 2017/02/01 6월 16th, 2017 No Comments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책활동가)

전반전

“그놈이 주소를 알고 있다면서 밤길 조심하라는 거에요, 글쎄! 사기꾼에게 사기꾼이라고 말한 게 잘못인가요?”

그 상담전화를 받은 것은 2011년 가을이었다. 싸이월드와 네이트에서 무려 3천5백만 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진 즈음이었다. 수화기 너머 여성분은 격앙돼 있었다.
가족이 납치되어 있다는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지만, 속지 않았단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언쟁이 오고간 후, 상대방이 가족 정보, 마침내 주소를 들먹이면서 협박을 하더란다. 무척 불안해진 이 분이 우리 단체에 상담을 해 온 이유는 마지막에 드러났다.

“주민번호를 바꾸게 해주세요!”

보이스피싱과 주민번호가 무슨 관계일까?

“제가 이사를 가도, 전화번호를 바꾸어도, 주민번호를 바꿀 수 없으면 쫓아올 수 있다구요.”

이 분은 핵심을 알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4년 주민번호에 대한 결정문에서 주민번호가 “공공영역이나 민간영역 개인정보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하는 만능열쇠이자 서로 다른 개인정보 데이터베이스 사이의 연결자 역할을” 해서 문제라고 보았다. 주민번호를 알면 고구마 줄기처럼 다른 개인정보도 딸려오는 것이다.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바꿀 수 있는데 왜 주민번호는 안 되나요?”

그렇게 우리는 주민번호 소송을 시작했다. 행정자치부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했다. 바꿔준다는 법이 없으니 못 바꿔준다는 것이었다. 민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행정법원으로 갔다. 패소했다. 헌법재판소로 갔다. 2014년 카드3사에서 1억 4백만 건이 유출되었다. 또다른 청구인들이 주민번호 소송에 결합했다.
2015년 12월 23일. 헌재가 주민번호 제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주민번호의 유출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 등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주민번호 변경을 일률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하였다. 가슴이 뛰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제도에 큰 변화가 올 터였다.

 

후반전

쟁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주민번호는 그 자체가 개인정보이다. 국가와 기관들이 알아보기 쉽게 지극히 편의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진 체계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유물이다. 13자리 숫자만으로 생년월일, 성별, 지역이 노출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주민번호를 알면 그 사람이 몇 살인지, 출생시 등록된 성별이 무엇인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도 알게 된다. 청년, 여성, 성소수자, 전라도 출신, 북한이탈주민 등 출생에 대한 질문을 들어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은 알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생 번호에 박혀 있는 개인정보가 국가적 폭력이다.
그러니 새 술은 새 부대에. 헌재 결정에 따라 국가가 주민번호를 바꾸어 주려면 새 번호를 발급해줄 수 밖에 없다. 새 주민번호는 임의번호가 좋다. 세계 여러 다른 나라처럼 국가 번호가 개인정보를 포함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행정자치부는 완강했다. 생년월일, 성별번호를 바꾸어줄 수가 없다고 했다. 합치면 7자리다. 그런데 13자리 중 7자리가 출생시 이미 결정되어 바꿀 수 없다면, 나머지 6자리를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주민번호 변경으로 유출된 주민번호를 보호하자는 헌재가 머쓱할 지경이다.
시간이 있었다. 헌재가 입법자에게 2017년 12월 31일까지 주민등록법을 개정하라고 시한을 주었다. 진선미 의원을 비롯해 여러 국회의원들이 임의번호 법안을 발의해둔 상태였다. 그런데 아뿔싸, 국회와 정부가 자기들 멋대로 주민등록법을 개정해 버렸다. 임의번호는 쏙 빼놓고. 공청회 한번 없었다. 50년 만의 주민번호 개선 기회가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20대 국회에 돌아온 진선미 의원이 임의번호 법안을 다시 발의하였다는 것이었다. 2017년 5월부터 주민번호 변경이 시작된다. 그러니 국회는 지금이라도 임의번호를 다시 논의해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법안 발의의원들에 항의전화가 일제히 쏟아졌다. 이 법이 동성애법이라는 것이었다. 대놓고 동성애를 차별하자는 주장도 납득되지 않았지만, 이 분들이 주민번호 유출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주민번호에서 개인정보를 삭제하자는 목소리는 억압되었다.
답답한 상황이다. 지금 국회 의안시스템에는 반대 의견만 1만 건이 달려 있다. 지구적으로 디지털 개인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는 시대에 언제까지 국가번호에 출생 년월일과 성별이 박제되어야 하는가? 임의번호에 공감하는 분이라면, 페북 한줄, 트윗 하나 꼭 부탁드린다. http://act.jinbo.net/wp/9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