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연재] 우리는 인터넷에서 자유를 발견했다{/}끊임없는 개인정보 유출… 그 뿌리는 주민등록제도

By 2016/12/31 3월 20th, 2018 No Comments

편집자주 : 한때 인터넷에서는 무한하게 자유로울 것이라 기대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저절로 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 이용자를 비롯한 시민들은 국가, 기업 등 권력자를 상대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합니다. 디지털 환경이 고도화할수록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권을 누리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터넷 도입 전후로부터 시작된 디지털 검열과 감시의 역사, 그리고 시민의 저항 속에 변화해온 제도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는 기획을 마련하였습니다. 제보와 잘못된 정보는 이메일 della 골뱅이 jinbo.net 로 알려 주십시오.

◈ 주민등록제도

주민등록제도는 국가신분증 발급, 전국민 식별번호 부여, 열손가락 지문날인, 거주지 이동신고(전입신고) 의무를 국민에게 모두 부여한 한국형 국가신분등록제도이다. 각각의 제도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더 멀리는 식민지시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기류령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반민주성, 인권침해성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현행 주민등록법은 ‘시·군의 주민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주민의 거주관계를 파악하고 상시로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하여 행정사무의 적정하고 간이한 처리를 도모할 목적’으로 1962. 5. 10.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제정하였다.

전자여권 해킹 국회시연_2008년 10월 7일

전자여권 해킹 국회시연_2008년 10월 7일

주민등록제도는 디지털 시대를 만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의 배경이 되고 국가 뿐 아니라 민간이 개인에 대해 손쉽게 추적하고 감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된 주민등록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한국 시민사회의 대응은 꾸준하게 계속되어 왔다. 1990년대 주민등록제도의 반민주 반인권 측면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이 형성되었다. 이는 1998년 전자주민증 반대운동과 1999년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토대가 되었으며 2000년대에는 인터넷 실명제와 주민등록번호 유출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국가신분등록제도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은 주민등록제도 외 가족관계등록부로도 이어졌다.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는 남자 중심의 호주제가 양성평등에 반한다는 취지로 헌법불합치를 결정하였고,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같은 해 3월 국회를 통과하였다. 시민사회는 양성평등과 다양한 가족에 대한 차별 해소, 정보인권 보호라는 원칙 속에서 호주제 이후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로서 목적별 신분증명제도를 지지하였다. 2007년 논란 끝에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신분증명서를 기본증명‧가족관계증명‧혼인증명 등 목적별로 분리하고, 원칙적으로 증명서 교부 대상을 본인과 배우자‧직계혈족 등으로 명확히 하는 등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재혼사실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불필요하게 노출시키는 데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2016년 5월 신청인이 사용 목적별로 증명이 필요한 정보만 선택하여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도록 가족관계등록법이 개정되었다.

전자신분증

디지털 시대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한국 시민사회의 요구는 1996년 전자주민카드 논쟁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87년 민주화와 문민정부 등장 이후 군사독재정권이 제정한 반인권 제도에 대한 개선 요구가 계속 이어졌다. 정부주도의 일방적인 정보화가 계속되어 온 가운데 1995년 4월 내무부가 전자주민카드 시행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주민등록제도의 반민주 반인권 측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중앙집중적인 전자주민카드가 가져올 개인정보 유출과 감시의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였다. 결국 1999년 2월에 전자주민카드 반대를 공약으로 제시한 김대중 정부가 첫 정권교체를 이루어내고 IMF 에 따른 긴축재정으로 전자주민카드 시행계획이 백지화되었다.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는 ‘전자주민카드 시행반대’와 함께 통합적인 프라이버시보호법의 제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외래 용어인 ‘프라이버시권’은 한국사회에서 매우 낯선 개념이었고 시민사회는 OECD 가이드라인(1980)의 기본 원칙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정부는 이후로도 주민등록증 갱신 시기마다 전자주민카드 혹은 전자주민증 도입을 계속하여 검토하였고 그때마다 유사한 논쟁이 벌어졌다. 1997년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담고 있었던 전자주민카드 구상은 주민등록증, 의료보험증, 운전면허증, 국민연금증 등 7개 분야 35개 개인정보를 한 장의 IC 카드, 즉 스마트카드에 담아 17세 이상의 모든 성인국민에게 소지하도록 하려는 발상이었다. 통합신분증화 대한 우려가 크게 불거지고 결국 전자주민카드가 백지화되자 정부는 이후 통합신분증 논란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2005년 참여정부는 삼성-조폐공사 컨소시엄의 ‘차세대 주민등록증 연구’를 통해 IC칩에 정보를 직접 수록하지 않고 연계 Key값을 탑재하여 운전면허 등 자격 및 각종 부가 서비스에 연계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연계에 따른 사용행적 ‘추적’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면서 추진이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 등장 후 또다시 전자주민증의 도입을 내용으로 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2010년 상임위원회인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하였다. 이때 전자주민증은 IC칩에 주민등록번호, 지문 등 12개 신원확인 항목만을 수록하고 연계서비스와 인증서 탑재 기능을 배제하였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편의점, 이동통신대리점 등 일상생활에서 전자판독의 증가와 사용행적 기록에 대해 우려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행정 효율성의 제고라는 장점을 부각시키고자 하였으나 결국 추진이 중단되었다. 언론에서 삼성 특혜 논란이 불거지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2011년 SK컴즈에서 대량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한 개인정보가 유출되자 대중적인 우려가 크게 증가한 데 따른 결과였다.

전자주민카드로 시작된 전자신분증에 대한 시민사회의 문제의식은 전자건강카드, 전자여권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2007년 2월 열린 '전자여권 도입을 위한 공청회'

2007년 2월 열린 ‘전자여권 도입을 위한 공청회’

2001년 4월 보건복지부는 의료기관의 부당·허위청구를 근절하겠다는 명목으로 전자건강카드 실시계획을 발표하였다. 전자건강카드가 신용카드기능을 내장한 통합형으로 발표되자 시민사회는 민감한 건강정보가 민간에 의해 오남용될 가능성에 대하여 크게 우려하였다. 2001년 12월 전자건강카드 시연회에 참여했던 윤태식씨가 아내인 수지김을 살해하였고 국가안전기획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02년 1월 보건복지부는 의료계와 시민단체 반대여론을 이유로 전자건강카드를 백지화하였다.

2007년 2월 외교통상부는 전자여권 도입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하고 이어 여권법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인권단체들은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과 정보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반대하였으나 정부는 미국과 비자면제협정을 이유로 전자여권 도입을 강행하였다. 2008년 2월 국회는 논란 끝에 지문수록을 2년 유예하는 내용으로 여권법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2008년 9월 전자여권이 발급된 지 한 달 만에 국회 국정감사에서 손쉽게 해킹되는 모습이 시연되었다. 이후 국회는 전자여권에서 민감한 생체정보인 지문을 삭제하기로 하고 다만 여권발급 과정에서 본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문정보를 수집했다가 3개월 후 삭제하는 내용으로 여권법을 개정하였다.